"효자 광주 정공엄지려"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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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엄|정엄(鄭淹, 1528~1580)]]의 효행을 기려 나라에서 내린 정려이다. 정려각 내에는 비(碑)와 함께 [[양림동_개비|개비]]라고 불리는 견석상(犬石像)이 1추(樞) 있다. 효자 정엄은 1558년(明宗戊午年)에 문과에 급제하여 승정원 동부승지를 지냈다. 모친 섬기기에 효성을 다하였고 병환 중이실 때에는 밤에도 옷을 벗지 않고 모친을 돌보았으며, 상을 당해서는 장례 절차를 성대히 하였으나 슬픔을 이기지 못하여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나니, 그 효성을 기리기 위하여 1611년 국가에서 정려(旌閭)를 명하였다. 이 후 정려각이 퇴락되어 1975년에 석조로 재건하였다. | *[[정엄|정엄(鄭淹, 1528~1580)]]의 효행을 기려 나라에서 내린 정려이다. 정려각 내에는 비(碑)와 함께 [[양림동_개비|개비]]라고 불리는 견석상(犬石像)이 1추(樞) 있다. 효자 정엄은 1558년(明宗戊午年)에 문과에 급제하여 승정원 동부승지를 지냈다. 모친 섬기기에 효성을 다하였고 병환 중이실 때에는 밤에도 옷을 벗지 않고 모친을 돌보았으며, 상을 당해서는 장례 절차를 성대히 하였으나 슬픔을 이기지 못하여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나니, 그 효성을 기리기 위하여 1611년 국가에서 정려(旌閭)를 명하였다. 이 후 정려각이 퇴락되어 1975년에 석조로 재건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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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9월 15일 (목) 17:10 판
- 정엄(鄭淹, 1528~1580)의 효행을 기려 나라에서 내린 정려이다. 정려각 내에는 비(碑)와 함께 개비라고 불리는 견석상(犬石像)이 1추(樞) 있다. 효자 정엄은 1558년(明宗戊午年)에 문과에 급제하여 승정원 동부승지를 지냈다. 모친 섬기기에 효성을 다하였고 병환 중이실 때에는 밤에도 옷을 벗지 않고 모친을 돌보았으며, 상을 당해서는 장례 절차를 성대히 하였으나 슬픔을 이기지 못하여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나니, 그 효성을 기리기 위하여 1611년 국가에서 정려(旌閭)를 명하였다. 이 후 정려각이 퇴락되어 1975년에 석조로 재건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