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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 * [[S2024-C015|유교·교육 공간이 만든 도시의 질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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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E2024-C252|광주의 이름이 바뀐 두 사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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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1월 2일 (금) 01:14 기준 최신판
광주의 이름이 바뀐 두 사건
이야기
광주지역의 행정 지위는 조선 시대 두 차례의 강등을 겪었다. ‘1430년 무진군 강등 사건’은 광주목사(光州牧使) 신보안(辛保安, ?~1428년)이 지역민 노흥준(盧興俊)의 기생 첩을 빼앗으려 하다 충돌이 발생한 데서 비롯되었다. 사건이 중앙에 보고된 뒤 노흥준은 유배되고, 광주목(光州牧)은 무진군(茂珍郡)으로 강등되었다. 이후 광주목 복호 과정에서 이선제(李先齊)가 중요한 역할을 하였고, 복호 후 건립된 희경루(喜慶樓)는 이를 기념하는 상징 건축물로 전해진다.
‘1489년 광산현 강등 사건’에서는 우윤공(禹允功)이 귀가 중 화살을 맞았으나 아전과 목사가 이를 수습하지 못한 일이 문제가 되었다. 조정은 이를 풍속을 바로잡고 후일을 경계하려는 조치로 해석하여 광주목을 광산현(光山縣)으로 강등시켰다.
스토리 그래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