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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 내러티브==
 
==스토리 내러티브==
1980년 5월 20일, 광주의 긴장감은 최고조에 달해 있었다. "5.20 최초의 집단발포"가 일어났다. 다음 날인 5월 21일, 이 사건은 더 큰 비극으로 이어졌다. [[광주역]]에서 두 구의 시민 시신이 발견되었고, 그들이 전날의 발포로 인해 사망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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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월 20일, 광주의 긴장감은 최고조에 달해 있었다. "5.20 최초의 집단발포"가 일어났다. 다음 날인 5월 21일, [[광주역_광장|광주역 광장]]에서 발포로 인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는 두 구의 시신이 발견되었다. 이 사건은 광주 시민들의 저항을 더욱 고무시켰다.
  
그날, 광주는 혼란의 도가니였다. "5.21 계엄군 자위권 발동"으로 인해 군인들의 발포가 이어졌고, 그 과정에서 [[계엄군]]의 첫 사망자가 발생하였다. 이 사건은 [[금남로]]와 [[옛 전남도청]]에서 벌어진 "금남로 전남도청 집단발포"로 이어지며,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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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광주는 혼란의 도가니였다. 시민군과 계엄군 사이의 치열한 충돌 속에서 장갑차에 의해 계엄군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였고, 이 장갑차가 시민들이 탈취한 것인지 아니면 계엄군의 것인지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 그러나 2006년과 2022년의 증언에 따르면, 장갑차는 계엄군의 것이었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한편, "[[시민군]] 조직"이루어지면서 시민들은 무기를 손에 넣기 시작했다. 이들은 전남 지역 외곽에서 무기를 탈취하여 경무장을 준비했다. 이러한 시민들의 저항은 "계엄군 자위권 발동"의 주체였던 [[노태우]]와 [[전두환]]의 지도 하에 더욱 강력한 탄압으로 맞서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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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계엄군은 [[금남로]]와 [[옛 전남도청]]에서 무차별 발포를 감행하였다. 발포로 최소 54명이 사망하고 500명 이상이 부상을 입었다. [[노태우]]와 [[전두환]]은 이 혼란 속에서 계엄군 자위권 발동을 이끌었다.
  
같은 날 [[전남대학교]]에서는 또 다른 참극이 벌어졌다. "전남대학교 총격"에서 최소 두 명이 사망했고, 최미애라는 임산부는 머리에 총을 맞고 사망하였다. 그녀의 비극은 곧 뱃속의 아이에게까지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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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시민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전남지역에서 무기를 탈취하여 경무장을 갖추게 되고 [[시민군]]을 조직하였다. 같은 날 [[전남대학교]]에서는 임산부 최미애씨가 머리에 총을 맞고 사망하는 등 최소 2명이 사망하는 비극이 발생하기도 했다.
  
 
이 일련의 사건들은 "광주 외곽 봉쇄"로 이어졌고, 광주는 외부와 철저히 단절되었다. 이러한 비극적인 사건들은 [[5.18민주화운동]]의 잔인한 현실을 대변하며, 오늘날까지 기억되고 있다. 광주는 여전히 그날의 상처를 안고 있지만, 그 아픔 속에서 피어난 민주화의 열망은 결코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이 일련의 사건들은 "광주 외곽 봉쇄"로 이어졌고, 광주는 외부와 철저히 단절되었다. 이러한 비극적인 사건들은 [[5.18민주화운동]]의 잔인한 현실을 대변하며, 오늘날까지 기억되고 있다. 광주는 여전히 그날의 상처를 안고 있지만, 그 아픔 속에서 피어난 민주화의 열망은 결코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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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참고자료==

2025년 5월 26일 (월) 00:34 판


시간을 넘어 진실을 찾아서 》 시민군과 계엄군 충돌 격화

스토리 내러티브

1980년 5월 20일, 광주의 긴장감은 최고조에 달해 있었다. "5.20 최초의 집단발포"가 일어났다. 다음 날인 5월 21일, 광주역 광장에서 발포로 인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는 두 구의 시신이 발견되었다. 이 사건은 광주 시민들의 저항을 더욱 고무시켰다.

그날, 광주는 혼란의 도가니였다. 시민군과 계엄군 사이의 치열한 충돌 속에서 장갑차에 의해 계엄군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였고, 이 장갑차가 시민들이 탈취한 것인지 아니면 계엄군의 것인지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 그러나 2006년과 2022년의 증언에 따르면, 이 장갑차는 계엄군의 것이었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이어 계엄군은 금남로옛 전남도청에서 무차별 발포를 감행하였다. 이 발포로 최소 54명이 사망하고 500명 이상이 부상을 입었다. 노태우전두환은 이 혼란 속에서 계엄군 자위권 발동을 이끌었다.

그러나 시민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전남지역에서 무기를 탈취하여 경무장을 갖추게 되고 시민군을 조직하였다. 같은 날 전남대학교에서는 임산부 최미애씨가 머리에 총을 맞고 사망하는 등 최소 2명이 사망하는 비극이 발생하기도 했다.

이 일련의 사건들은 "광주 외곽 봉쇄"로 이어졌고, 광주는 외부와 철저히 단절되었다. 이러한 비극적인 사건들은 5.18민주화운동의 잔인한 현실을 대변하며, 오늘날까지 기억되고 있다. 광주는 여전히 그날의 상처를 안고 있지만, 그 아픔 속에서 피어난 민주화의 열망은 결코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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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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