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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미의병은 1907년 8월 1일 한국군대의 강제 해산과 이에 반발한 해산군인들의 대일항전(對日抗戰)에서 비롯되었다. 군대해산조칙이 내려진 당일 서울의 시위대(侍衛隊) 대대장 박승환(朴昇煥)이 자결했다는 소식을 듣고, 서울시위대 해산군인들이 일본군과 시가전을 전개하면서 대일항전을 개시하였다. | * 정미의병은 1907년 8월 1일 한국군대의 강제 해산과 이에 반발한 해산군인들의 대일항전(對日抗戰)에서 비롯되었다. 군대해산조칙이 내려진 당일 서울의 시위대(侍衛隊) 대대장 박승환(朴昇煥)이 자결했다는 소식을 듣고, 서울시위대 해산군인들이 일본군과 시가전을 전개하면서 대일항전을 개시하였다. | ||
* 그 뒤 각 지방의 해산군인들도 잇달아 봉기하였다. 먼저 8월 2일 원주진위대(原州鎭衛隊) 군인들이, 8월 10일 강화분견대(江華分遣隊) 군인들이 봉기하였고, 홍주분견대, 진주진위대 등에서 해산군인들은 의병에 가담하여 의병항일전의 주축이 되었다. | * 그 뒤 각 지방의 해산군인들도 잇달아 봉기하였다. 먼저 8월 2일 원주진위대(原州鎭衛隊) 군인들이, 8월 10일 강화분견대(江華分遣隊) 군인들이 봉기하였고, 홍주분견대, 진주진위대 등에서 해산군인들은 의병에 가담하여 의병항일전의 주축이 되었다. |
2024년 2월 17일 (토) 16:51 기준 최신판
Definition
- 정미의병(丁未義兵): 고종의 강제 퇴위, 정미7조약 체결, 군대해산 등을 계기로 1907∼1910년간에 일어난 항일무력전으로 해산군인, 유생, 상인, 농민, 천민 등이 참여했다.
- 정미의병은 1907년 8월 1일 한국군대의 강제 해산과 이에 반발한 해산군인들의 대일항전(對日抗戰)에서 비롯되었다. 군대해산조칙이 내려진 당일 서울의 시위대(侍衛隊) 대대장 박승환(朴昇煥)이 자결했다는 소식을 듣고, 서울시위대 해산군인들이 일본군과 시가전을 전개하면서 대일항전을 개시하였다.
- 그 뒤 각 지방의 해산군인들도 잇달아 봉기하였다. 먼저 8월 2일 원주진위대(原州鎭衛隊) 군인들이, 8월 10일 강화분견대(江華分遣隊) 군인들이 봉기하였고, 홍주분견대, 진주진위대 등에서 해산군인들은 의병에 가담하여 의병항일전의 주축이 되었다.
- 특히, 후기로 접어들면서 호남일대의 의병 항쟁이 치열해지자, 일제는 1909년 9월부터 약 2개월에 걸쳐 이른바 ‘남한대토벌작전’이라는 대공세를 펼쳤다. 그 결과 정미의병은 1909년 후반기부터 점차 예기가 꺾여 1910년을 지나면서부터는 전면항일전으로서의 의미가 상실되고 말았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