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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행본 ||김세곤, 『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 온새미로, 2011. || || https://doi.org/10.978.897017/5041 | | 단행본 ||김세곤, 『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 온새미로, 2011. || || https://doi.org/10.978.897017/504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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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오수열, 황태섭, 「의병장 고경명(高敬命) 선생의 생애에 관한 소고(小考)」, 군사발전연구, 9(1), 1-19, 2015.||KCI소||http://www.earticle.net.ssl.openlink.aks.ac.kr:8080/Article/A267097 | |논문||오수열, 황태섭, 「의병장 고경명(高敬命) 선생의 생애에 관한 소고(小考)」, 군사발전연구, 9(1), 1-19, 2015.||KCI소||http://www.earticle.net.ssl.openlink.aks.ac.kr:8080/Article/A26709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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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5월 30일 (목) 19:44 판
나라를 사랑한 의로운 병사들 》 나라를 사랑한 부자
Story
임진왜란으로 나라가 어려움에 빠졌을 때 광주의 백성들은 스스로 병사를 일으켜 나라를 지키고자 했습니다. 이런 분들을 의병이라고 하지요. 의병 중 고경명과 그의 아들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환갑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의병의 지도자 전투에 나섰던 고경명은 고인후(1561∼1592)와 함께 금산전투에서 목숨을 잃게되죠. 그 소식을 뒤늦게 들은 첫째 아들 고종후(1554~1593)도 뛰어들려고 하였으나 이미 전투는 기울었기에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다행히도 이 집안의 노비였던 귀인과 봉이가 고종후를 끝까지 말려 목숨을 구했습니다. 그 이후 이들은 진주로 옮겨 끝까지 나라를 위해 싸웠지만 결국 진주성 전투에서 모두 전사했습니다. 이렇게 나라를 위해 헌신한 고종후와 그의 아들들은 포충사에 모시고 기억하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비록 노비 신분이지만 나라를 사랑한 마음 만큼은 모두 같이 귀했던 귀인과 봉이도 함께 기억하기 위해 포충사에 비석을 세웠답니다.
Semantic Data
Node 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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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2023-108a | Story | Episode | 나라를 사랑한 부자 | http://dh.aks.ac.kr/~gwangju/wiki/index.php/S2023-108a | http://dh.aks.ac.kr/~gwangju/icon/episode.png |
Web Resource
Bibliography
No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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