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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시 북구 [[임동|임동]]은 조선 후기에는 버드나무 등 다양한 나무가 울창하게 우거진 숲길, [[유림숲]]의 일부였다. [[유동]]과 합쳐서 [[버드리]]라고 불리다가 1935년에 두 지역이 분리되었고, 광복 이후인 1947년부터 임동으로 불리게 되었다. 광주읍성의 북문에서 장성으로 가는 길목이어서 한양으로 오가는 사람들이 반드시 지나갔다고 한다. 광주천과 서방천에 의한 퇴적지형으로 농토가 비옥하여 일제시대부터 농업 관련 시설들이 많았었고, 1935년에는 일신방직, 전남방직이 이곳으로 이전하면서 시가지가 형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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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시 북구 [[임동|임동]]은 조선 후기에는 버드나무 등 다양한 나무가 울창하게 우거진 숲길, [[유림숲]]의 일부였다. [[유동]]과 합쳐서 [[버드리]]라고 불리다가 1935년에 두 지역이 분리되었고, 광복 이후인 1947년부터 임동으로 불리게 되었다. [[광주읍성]]의 북문에서 장성으로 가는 길목이어서 한양으로 오가는 사람들이 반드시 지나갔다고 한다. 광주천과 서방천에 의한 퇴적지형으로 농토가 비옥하여 일제시대부터 농업 관련 시설들이 많았었고, 1935년에는 [[일신방직]], [[전남방직]]이 이곳으로 이전하면서 시가지가 형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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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9월 2일 (금) 09:42 기준 최신판

Definition

광주시 북구 임동은 조선 후기에는 버드나무 등 다양한 나무가 울창하게 우거진 숲길, 유림숲의 일부였다. 유동과 합쳐서 버드리라고 불리다가 1935년에 두 지역이 분리되었고, 광복 이후인 1947년부터 임동으로 불리게 되었다. 광주읍성의 북문에서 장성으로 가는 길목이어서 한양으로 오가는 사람들이 반드시 지나갔다고 한다. 광주천과 서방천에 의한 퇴적지형으로 농토가 비옥하여 일제시대부터 농업 관련 시설들이 많았었고, 1935년에는 일신방직, 전남방직이 이곳으로 이전하면서 시가지가 형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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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광주드림 [광주갈피갈피]1916년 1월 광주 임동 영하 4.8도(2014-01-21, 조광철) 1910년대 임동에 있었던 광주종묘장의 모습 https://cdn.gjdream.com/news/photo/old/news/contents/UPFILE/2014/20140121452451.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