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괄의 난"의 두 판 사이의 차이

광주문화예술인문스토리플랫폼
이동: 둘러보기, 검색
(새 문서: ==Definition== 태봉산_유래비는 1967년까지 태봉산이 있었던 신안동 121-2번지 위치에 세워진 비석이다. 태봉산의 흙은 경양...)
 
잔글 (Web Resource)
 
(같은 사용자의 중간 판 2개는 보이지 않습니다)
1번째 줄: 1번째 줄:
 
==Definition==
 
==Definition==
[[태봉산_유래비|태봉산_유래비]]는 1967년까지 태봉산이 있었던 신안동 121-2번지 위치에 세워진 비석이다. 태봉산의 흙은 [[경양방죽]]을 메우는데 쓰였고 산이 있던  자리에는 광주역이 들어섰다. 현재는 그 주변이 온통 아파트, 주상 복합 건물들로 채워지고 있는 중이다. 비석은 초현대적인 고층 건물들 사이에서 혼자만 두드러지는 독특한 모습으로 그 자리에 있다. 태봉산의 전설, 태실의 발견, 태봉산의 소멸 등이 기록되어 있다.
+
[[이괄의_난|이괄의_난]] 은 1624년(인조2년)에 이괄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반란이다. 광해군을 몰아내고 반정을 통해 집권한 [[인조]]와 반정 공신들은 역모, 반역에 대하여 지나칠 정도로 예민하게 대처했는데, 이러한 분위기에서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처형당한 인물들이 꽤 많았다. 마침 몇몇 관료들이 이괄 부자(父子)등을 역모죄로 고변하자, 인조는 그의 아들을 한양으로 불러 사실을 조사하려 하였다. 이에 반발한 이괄이 정예군 약 1만 명을 끌고 평안도에서 서울로 진격, 한양 입성에 성공하였다. 인조와 신하들은 충남 공주까지 피난하였는데, 국내 반란으로 왕이 타 지역으로 몽진까지 하게 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고, 반란군에 의해 한양이 점령당한 것도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괄은 한양 점령 4일 만에 그사이 지방에서 올라온 수많은 관군들에게 대패하여 경기 광주까지 쫓겨갔고, 거기에서 부하의 배신으로 죽음을 당하였다.
  
 
==Web Resource==
 
==Web Resource==
7번째 줄: 7번째 줄:
 
! type || resource || title || desctription/caption || URL
 
! type || resource || title || desctription/caption || URL
 
|-
 
|-
| 사진 ||  [http://dh.aks.ac.kr/~gwangju/wiki/index.php/대문 스토리파크 흥미로운가] ||  태봉산 유래비 해설 ||   || http://dh.aks.ac.kr/~gwangju/wiki/images/3/39/태봉산유래비해설.jpg
+
| 사진 ||  흥미진진 공주 문화 관광 ||  공주공산성 || 이괄의 난 때 인조가 피신한 곳  || https://www.gongju.go.kr/thumbnail/tursmCn/920_TUCN_202004270528528401.jpg
 
|-
 
|-
| 사진 ||  [http://dh.aks.ac.kr/~gwangju/wiki/index.php/대문 스토리파크 흥미로운가] ||  태봉산 유래비 ||   || http://dh.aks.ac.kr/~gwangju/wiki/index.php/태봉산유래비1.jpg
+
| 지도 ||  KBS 역사저널 그 날 공식블로그 ||  이괄의 난 || 한양 점령  || https://blogfiles.pstatic.net/20160705_246/musieur89_14676460912828HmTP_JPEG/11.jpg
 
|-
 
|-
 
|}
 
|}
  
 
[[분류:문맥항목]] [[분류:김윤희]]
 
[[분류:문맥항목]] [[분류:김윤희]]

2022년 9월 1일 (목) 15:32 기준 최신판

Definition

이괄의_난 은 1624년(인조2년)에 이괄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반란이다. 광해군을 몰아내고 반정을 통해 집권한 인조와 반정 공신들은 역모, 반역에 대하여 지나칠 정도로 예민하게 대처했는데, 이러한 분위기에서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처형당한 인물들이 꽤 많았다. 마침 몇몇 관료들이 이괄 부자(父子)등을 역모죄로 고변하자, 인조는 그의 아들을 한양으로 불러 사실을 조사하려 하였다. 이에 반발한 이괄이 정예군 약 1만 명을 끌고 평안도에서 서울로 진격, 한양 입성에 성공하였다. 인조와 신하들은 충남 공주까지 피난하였는데, 국내 반란으로 왕이 타 지역으로 몽진까지 하게 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고, 반란군에 의해 한양이 점령당한 것도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괄은 한양 점령 4일 만에 그사이 지방에서 올라온 수많은 관군들에게 대패하여 경기 광주까지 쫓겨갔고, 거기에서 부하의 배신으로 죽음을 당하였다.

Web Resource

type resource title desctription/caption URL
사진 흥미진진 공주 문화 관광 공주공산성 이괄의 난 때 인조가 피신한 곳 https://www.gongju.go.kr/thumbnail/tursmCn/920_TUCN_202004270528528401.jpg
지도 KBS 역사저널 그 날 공식블로그 이괄의 난 한양 점령 https://blogfiles.pstatic.net/20160705_246/musieur89_14676460912828HmTP_JPEG/11.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