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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 광산구 진곡동에 자리했던 [[진천사|진천사]]는 오늘날 자취를 감췄지만, 조선 후기 광주 지역 유학자들의 사후 기억을 간직한 뜻깊은 장소였다. 이 사우에는 [[박광일|박광일(朴光一)]]을 비롯하여 [[박상현|박상현(朴尙玄)]], [[박충정|박충정(朴忠挺)]], [[박치도|박치도(朴致道)]], [[박영림|박영림(朴榮林)]] 등 여러 문인과 학자들이 배향되었으며, 조선 유학의 큰 줄기를 이은 [[송시열|송시열(宋時烈)]]의 제자 [[박광일|박광일]]은 그 중심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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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지역의 학맥을 잇는 대표적 문인 가운데 한 사람인 [[박광일|박광일(朴光一)]]은 조선 후기의 유학자로, 우암 [[송시열|송시열(宋時烈)]]의 문인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부친 [[박상현|박상현(朴尙玄)]]은 광주에서 유학을 기반으로 한 가풍을 일구었으며, 박광일을 송시열에게 보내 수학하게 하였다. 송시열은 박광일의 강론을 높이 평가하며 ‘치수불루(置水不漏)’라 칭했으며, 이는 박광일의 학문적 정밀함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박광일은 강론이 치밀하고 반듯하다는 평을 들으며 ‘치수불루(置水不漏)’라는 찬사를 받았고, 그의 시문은 후일 손자 [[박중거|박중거(朴重擧)]]가 수습하여 [[손재선생문집|『손재선생문집』]]으로 간행되었다. 그는 [[강진_남강서원|강진 남강서원]]에도 배향되어, 조선 유학의 대표자였던 [[송시열|송시열]]과 나란히 모셔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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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광일은 말년에 관직을 사양하고 지리산 문수동에 거처하면서 학문과 저술에 전념하였다. 그의 시문은 후손에 의해 정리되어 『[[손재선생문집|손재선생문집]]』으로 간행되었고, 그를 기리는 공간인 [[손재로|손재로]] 역시 그의 호를 따 명명되었다. 이처럼 박광일은 광주 지역 유학의 지적 전통과 정서를 집약한 인물로서, 광주 및 강진 지역에서 추앙의 대상이 되었다.
  
오늘날 [[진천사|진천사]]가 있던 자리에 세워진 [[진천사유허비|진천사유허비]]는 사우의 초건 시기를 1635년으로 전하며, 후손 [[김동수]]의 찬문으로 1935년에 재건되었다. 이 유허비는 광주 지역 사림의 교유와 사우의 전통을 기념하는 유산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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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배향 공간은 두 곳에 나뉜다. 광주광역시 진곡동의 [[진천사|진천사]]는 [[박상현|박상현]], [[박광일|박광일]] 부자를 비롯하여 [[박충정|박충정]], [[박치도|박치도]], [[박중회|박중회]], [[박영림|박영림]] 등 광주 유림들이 함께 배향된 사우로, 조선 후기의 유교 지식 공동체가 공간적으로 응집된 모습을 보여준다. 현재 진천사는 사라졌으나 [[진천사유허비|진천사유허비]]가 그 흔적을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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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전라남도 강진에 위치한 [[강진_남강서원|강진 남강서원]]에는 송시열과 함께 박광일이 배향되어 있으며, 이는 그가 지역을 넘어 조선 유학의 계보에서 인정받은 인물임을 방증한다. 지역을 달리하는 두 기념공간은 박광일이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지방 유학의 네트워크와 기억의 공간들이 어떻게 형성되고 지속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라 할 수 있다.
  
 
== 스토리 그래프 ==
 
== 스토리 그래프 ==

2025년 6월 30일 (월) 18:58 기준 최신판

광주의 학자 박광일, 물 한 방울 새지 않던 학문

이야기

광주 지역의 학맥을 잇는 대표적 문인 가운데 한 사람인 박광일(朴光一)은 조선 후기의 유학자로, 우암 송시열(宋時烈)의 문인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부친 박상현(朴尙玄)은 광주에서 유학을 기반으로 한 가풍을 일구었으며, 박광일을 송시열에게 보내 수학하게 하였다. 송시열은 박광일의 강론을 높이 평가하며 ‘치수불루(置水不漏)’라 칭했으며, 이는 박광일의 학문적 정밀함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박광일은 말년에 관직을 사양하고 지리산 문수동에 거처하면서 학문과 저술에 전념하였다. 그의 시문은 후손에 의해 정리되어 『손재선생문집』으로 간행되었고, 그를 기리는 공간인 손재로 역시 그의 호를 따 명명되었다. 이처럼 박광일은 광주 지역 유학의 지적 전통과 정서를 집약한 인물로서, 광주 및 강진 지역에서 추앙의 대상이 되었다.

그의 배향 공간은 두 곳에 나뉜다. 광주광역시 진곡동의 진천사박상현, 박광일 부자를 비롯하여 박충정, 박치도, 박중회, 박영림 등 광주 유림들이 함께 배향된 사우로, 조선 후기의 유교 지식 공동체가 공간적으로 응집된 모습을 보여준다. 현재 진천사는 사라졌으나 진천사유허비가 그 흔적을 전하고 있다.

한편, 전라남도 강진에 위치한 강진 남강서원에는 송시열과 함께 박광일이 배향되어 있으며, 이는 그가 지역을 넘어 조선 유학의 계보에서 인정받은 인물임을 방증한다. 지역을 달리하는 두 기념공간은 박광일이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지방 유학의 네트워크와 기억의 공간들이 어떻게 형성되고 지속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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