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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이 작업은 전국을 돌며 전시되었고, 한양대 집회에서도 공개되었지만, 그중 일부는 전시 도중 경찰에 의해 파손되기도 했다. 관련 사건. 이후 이 그림은 북으로 넘어가 북한 작가들에 의해 복원되어 제13차 평양_세계청년학생축전에서 다시 전시되며, 분단된 민족 사이의 상징적 교류로 재탄생하였다. 이 복원 작업에도 [[홍성담]]이 기여했다 | + | 이 작업은 전국을 돌며 전시되었고, 한양대 집회에서도 공개되었지만, 그중 일부는 전시 도중 경찰에 의해 파손되기도 했다. 관련 사건. 이후 이 그림은 북으로 넘어가 북한 작가들에 의해 복원되어 제13차 평양_세계청년학생축전에서 다시 전시되며, 분단된 민족 사이의 상징적 교류로 재탄생하였다. 이 복원 작업에도 [[홍성담]]이 기여했다.<ref>[http://aks.ai/GC60005713 디지털광주문화대전 ☞ 「민족해방운동사」<br>"1989년 6월 홍성담은 걸개그림의 슬라이드 필름을 LA ‘민족학교’를 통하여 평양으로 보내 남한의 진보적 작가들이 우리의 근현대사를 어떻게 해석하여 형상화하는지 알리고자 하였다. 이후 북한의 화가들이 이를 복원하여 전시하였고, 이는 이른바 ‘민해운사 사건’의 발단이 되어 정치적 문제로 비화되었다."]</ref> |
《민족 해방 운동사》는 단지 과거를 그린 그림이 아니다. 그것은 역사적 고비마다 목소리를 잃었던 민중의 서사를 예술로 복원하고, 그 기록을 공동의 기억으로 공유하고자 한 집단적 선언이었다. 이 걸개그림은 그래서, 민족을 위한 예술의 형식이자, 연대의 형식이었다. | 《민족 해방 운동사》는 단지 과거를 그린 그림이 아니다. 그것은 역사적 고비마다 목소리를 잃었던 민중의 서사를 예술로 복원하고, 그 기록을 공동의 기억으로 공유하고자 한 집단적 선언이었다. 이 걸개그림은 그래서, 민족을 위한 예술의 형식이자, 연대의 형식이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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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6월 30일 (월) 19:57 기준 최신판
홍성담과 《민족 해방 운동사》 걸개그림
이야기
1989년 5월, 광주 금남로에서 펼쳐진 초대형 걸개그림 《민족해방운동사》는 한 편의 역사서이자, 민중미술이 쏘아올린 집단 창작의 결정체였다. 이 그림은 단순한 회화가 아니었다. '갑오농민전쟁'부터 '조국통일운동'까지, 민족의 투쟁사를 11폭으로 나눈 걸개그림은 시대를 꿰뚫는 서사이자, 전국 진보 미술인들이 함께 만든 연대의 상징이었다.
그 중심에는 홍성담이 있었다. 그는 시각매체연구소의 일원으로 참여했으며, 이 단체는 '8폭-광주민중항쟁' 장면의 제작을 맡았다. 걸개그림 각 폭은 지역별 예술 공동체의 협업으로 제작되었다. 청년미술공동체는 '3폭-항일무장투쟁'과 '10폭-민족자주화'을, 전주겨레미술연구소는 '1폭-갑오농민전쟁'을, 부산미술운동연구소는 '7폭-민주화 운동과 부마항쟁을 그려냈다.
이 작업은 전국을 돌며 전시되었고, 한양대 집회에서도 공개되었지만, 그중 일부는 전시 도중 경찰에 의해 파손되기도 했다. 관련 사건. 이후 이 그림은 북으로 넘어가 북한 작가들에 의해 복원되어 제13차 평양_세계청년학생축전에서 다시 전시되며, 분단된 민족 사이의 상징적 교류로 재탄생하였다. 이 복원 작업에도 홍성담이 기여했다.[1]
《민족 해방 운동사》는 단지 과거를 그린 그림이 아니다. 그것은 역사적 고비마다 목소리를 잃었던 민중의 서사를 예술로 복원하고, 그 기록을 공동의 기억으로 공유하고자 한 집단적 선언이었다. 이 걸개그림은 그래서, 민족을 위한 예술의 형식이자, 연대의 형식이었다.
스토리 그래프
참고자료
| type | resource | title | description/caption | URL |
|---|---|---|---|---|
| 해설 | 디지털광주문화대전 | 「민족해방운동사」 | http://aks.ai/GC60005713 | |
| 해설 | 부산역사문화대전 | 민족 해방 운동사 걸개그림 사건 | http://busan.grandculture.net/Contents?local=busan&dataType=01&contents_id=GC04206915 | |
| 논문 | RISS | 임종영, 「1980년대 광주지역 걸개그림에 대한 연구」,『호남학』No.57, 전남대학교 호남학연구원, 2015. | https://www.riss.kr/link?id=A1014043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