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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유학시절 [[2.8독립선언]]을 주도하였으며, ‘조선청년독립단’ 결성을 통해 활동조직을 규합하는 임무를 맡았다. | * 일본 유학시절 [[2.8독립선언]]을 주도하였으며, ‘조선청년독립단’ 결성을 통해 활동조직을 규합하는 임무를 맡았다. | ||
* 귀국 후 동아일보 기자로 활동하면서 1927년 2월 서울에서 안재홍 등과 ‘[[신간회]]’ 발족에 참여하였으며, 『동아일보』에 「횡설수설」이라는 제목으로 일제의 식민통치를 비판하는 글을 실어 옥고를 치렀다.<ref>[http://aks.ai/GC60002185 한국학중앙연구원, 최원순, 디지털광주문화대전]</ref> | * 귀국 후 동아일보 기자로 활동하면서 1927년 2월 서울에서 안재홍 등과 ‘[[신간회]]’ 발족에 참여하였으며, 『동아일보』에 「횡설수설」이라는 제목으로 일제의 식민통치를 비판하는 글을 실어 옥고를 치렀다.<ref>[http://aks.ai/GC60002185 한국학중앙연구원, 최원순, 디지털광주문화대전]</ref> | ||
− | * 1923년 일본 와세다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하여 그 해 6월 16일 동경 여자의학전문학교 출신의 현덕신(玄德信)과 서울 종로 중앙예식장에서 김창준(金昌俊) 목사의 주례로 혼인식을 올렸다 | + | * 1923년 일본 와세다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하여 그 해 6월 16일 동경 여자의학전문학교 출신의 [[현덕신]](玄德信)과 서울 종로 중앙예식장에서 김창준(金昌俊) 목사의 주례로 혼인식을 올렸다 |
− | * [[최원순]]은 몇차례의 옥고로 얻은 폐결핵 치료를 위해 1928년 광주로 돌아왔다. 요양을 위해 [[무등산]] 자락에 집을 짓고 ‘석아정(石啞亭)’이라 했는데, 나중에 [[최흥종]] 목사가 거처하면서 ‘오방정’이라 했고 광복 후 개축하여 [[허백련춘설헌]]이 됐다. | + | * [[최원순]]은 몇차례의 옥고로 얻은 폐결핵 치료를 위해 1928년 광주로 돌아왔다. 요양을 위해 [[무등산]] 자락에 집을 짓고 ‘석아정(石啞亭)’이라 했는데, 나중에 [[최흥종]] 목사가 거처하면서 ‘오방정’이라 했고 광복 후 개축하여 [[허백련춘설헌]]이 됐다. <ref>[http://seoults.com/news/view.php?idx=460 서울통신, 광주의 인물, 독립운동가 석아 최원순, 2020-04-17]</ref> |
* 요양을 위해 광주로 돌아와서도 [[계유구락부]]의 일원으로 지역사회의 변혁과 빈민구제 활동을 하다가 1936년 41세에 사망하였다 | * 요양을 위해 광주로 돌아와서도 [[계유구락부]]의 일원으로 지역사회의 변혁과 빈민구제 활동을 하다가 1936년 41세에 사망하였다 | ||
− | * 참조: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46354 | + | * 참조: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4635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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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문맥항목/2023]] [[분류:박광석]] [[분류:문화/2023]] | [[분류:문맥항목/2023]] [[분류:박광석]] [[분류:문화/2023]] |
2024년 3월 17일 (일) 12:38 기준 최신판
Definition
- 최원순(崔元淳, 1896~1936): 광주 출생의 독립운동가.
- 호는 석초(石蕉), 석아(石啞)이다. 1919년 2.8독립선언의 주역이며, 일제의 식민통치를 비판한 언론인이다.
- 일본 유학시절 2.8독립선언을 주도하였으며, ‘조선청년독립단’ 결성을 통해 활동조직을 규합하는 임무를 맡았다.
- 귀국 후 동아일보 기자로 활동하면서 1927년 2월 서울에서 안재홍 등과 ‘신간회’ 발족에 참여하였으며, 『동아일보』에 「횡설수설」이라는 제목으로 일제의 식민통치를 비판하는 글을 실어 옥고를 치렀다.[1]
- 1923년 일본 와세다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하여 그 해 6월 16일 동경 여자의학전문학교 출신의 현덕신(玄德信)과 서울 종로 중앙예식장에서 김창준(金昌俊) 목사의 주례로 혼인식을 올렸다
- 최원순은 몇차례의 옥고로 얻은 폐결핵 치료를 위해 1928년 광주로 돌아왔다. 요양을 위해 무등산 자락에 집을 짓고 ‘석아정(石啞亭)’이라 했는데, 나중에 최흥종 목사가 거처하면서 ‘오방정’이라 했고 광복 후 개축하여 허백련춘설헌이 됐다. [2]
- 요양을 위해 광주로 돌아와서도 계유구락부의 일원으로 지역사회의 변혁과 빈민구제 활동을 하다가 1936년 41세에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