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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광주 사람들의 눈길을 끄는 단발머리 여의사로도 유명했다. 이 단발에는 잊지 못할 사연이 있었다. 일본에서 돌아온 어느 새벽, 한 청년이 다급히 찾아와 위급한 산모를 살려 달라며 왕진을 청했다. 가방을 챙기던 그는 잠시 긴 머리를 고쳐 묶고 나섰지만, 도착했을 때는 이미 산모와 아이 모두 세상을 떠난 뒤였다. 그날 이후 그는 머리 손질에 허비한 그 짧은 시간을 마음에 새기며 단발로 머리를 잘랐고, 평생 그 모습을 지켰다. | 그는 광주 사람들의 눈길을 끄는 단발머리 여의사로도 유명했다. 이 단발에는 잊지 못할 사연이 있었다. 일본에서 돌아온 어느 새벽, 한 청년이 다급히 찾아와 위급한 산모를 살려 달라며 왕진을 청했다. 가방을 챙기던 그는 잠시 긴 머리를 고쳐 묶고 나섰지만, 도착했을 때는 이미 산모와 아이 모두 세상을 떠난 뒤였다. 그날 이후 그는 머리 손질에 허비한 그 짧은 시간을 마음에 새기며 단발로 머리를 잘랐고, 평생 그 모습을 지켰다. | ||
2025년 12월 26일 (금) 17:00 기준 최신판
충장로의 단발머리 여의사
이야기
현덕신(玄德信, 1896~1963)은 1921년 일본 유학을 마치고 귀국해 당시 최고의 여성 전문 병원이던 동대문부인병원에서 소아과와 산부인과 의사로 재직했다. 이후 남편 최원순(崔元淳)과 함께 광주로 내려와 충장로 4가의 옛 화니백화점 인근에 현덕신의원을 개업하였다. 이곳은 광주 최초의 여성 전문 병원으로 여성과 아동을 진료했으며, 현준호 등 지역 유지들의 지원을 받았다.
그는 광주 사람들의 눈길을 끄는 단발머리 여의사로도 유명했다. 이 단발에는 잊지 못할 사연이 있었다. 일본에서 돌아온 어느 새벽, 한 청년이 다급히 찾아와 위급한 산모를 살려 달라며 왕진을 청했다. 가방을 챙기던 그는 잠시 긴 머리를 고쳐 묶고 나섰지만, 도착했을 때는 이미 산모와 아이 모두 세상을 떠난 뒤였다. 그날 이후 그는 머리 손질에 허비한 그 짧은 시간을 마음에 새기며 단발로 머리를 잘랐고, 평생 그 모습을 지켰다.
이 밖에도 현덕신은 광주 YWCA 활동에 참여하여 여성과 아동의 권익 향상과 지역 여성운동에 힘을 쏟았다.
스토리 그래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