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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2월 24일 (수) 17:00 판
조선 후기 문인 박광후와 외성당
이야기
광주광역시 광산구 안청동에는 조선 후기 문인 박광후(朴光後)가 거처하던 고택 외성당(畏省堂)이 있었다. 외성당은 조선 후기 현재의 광산구 안청동에 자리했던 고택으로, 지금은 철거되어 그 모습을 확인할 수 없다. 『광주읍지(光州邑誌)』에 따르면 이곳은 주읍의 북쪽 30리 지점에 위치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박광후는 자를 사술(士述), 호를 안촌(安村) 또는 외성당(畏省堂)이라 하며, 조선 현종 연간에 성균관에 들어가 송시열로부터 “은산과 철벽이 될 인물”이라는 평가를 받은 문인이었다. 그는 1678년 자택인 외성당에서 42세로 생을 마쳤고, 이후 이 집은 아들 박중회(朴重繪)가 물려받아 거주하였다.
외성당은 1930년대 철거된 뒤 지금은 건물이 남아 있지 않지만, 현재 그 터에는 새로운 건물이 들어서 있다. 다만 마당에 있었던 은행나무가 남아 있어, 한때 이곳에 고택이 있었음을 전하는 흔적으로 여겨진다. 이 집과 관련된 기록으로는 한말 의병장 기우만(奇宇萬,1846~1916)이 남긴 「외성당기(畏省堂記)」와, 박광후의 후손 박만동(朴萬東)의 요청에 따라 최익현(崔益鉉, 1833~1907)이 집필한 또 다른「외성당기(畏省堂記)」가 전한다. 특히 최익현은 당호인 ‘외성(畏省)’의 ‘두려워하며 살피라’라는 뜻의 의미를 빌려, 서양 문물 유입으로 전통이 흔들리던 당대의 사회상을 비판하였다.
스토리 그래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