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상원
기본 정보
| 이름 | 윤상원 |
|---|---|
| 한자명 | 尹祥源 |
| 위도(latitude) | 35.15008220000001 |
| 경도(longitude) | 126.8559071 |
| 생몰년도 | 1950년~1980년 |
| 성별 | 남성 |
| 국적 | 대한민국 |
| 출생지 | 광주 |
정의 및 개요
주요 활동/업적/저서/작품 등
- 1950년 전남 광산군 임곡면(현 광주광역시 광산구)에서 태어나 광주 시내 중고교를 거쳐 전남대학교 정치외교학과(71학번)에 진학하였다.
- 재학 중 김상윤(민청학련 사건 관련 구속자)과의 만남이 사회 운동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가 되었다.
- 1979년에는 대학 후배이자 열정적인 노동운동가였던 박기순의 권유로 들불야학에서 강사로 6개월간 활동하였는데, 당시 열사가 거주했던 광천시민아파트와 광천동성당 내 야학 터가 아직 남아 있다.
지역/사건/단체 내 역할 또는 영향력
- 1979년 10월 26일, 18년 간 군사 독재를 자행하던 박정희가 암살당하고, 국내에서는 민주화에 대한 기대와 열망이 커져가고 있었다. 그러던 중 실권을 장악한 전두환 등 신군부 세력에 의해, 1980년 5월 18일 0시 전국에 갑자기 비상계엄이 선포되었다.
- 5월 19일, 단지 민주화를 열망할 뿐인 광주 시민들을 향하여 공수부대는 집단 발포와 학살을 자행하였다. 이를 목격한 윤상원은 투쟁에 참여하면서 야학 활동가들과 함께 '투사회보'를 제작하여 고립된 광주의 상황을 알리고자 하였다.
- 5월 25일 윤상원과 동지들은 최후까지 옛 전남도청을 지키기로 결의했고, 윤상원은 도청 항쟁 지도부의 대변인을 맡았다.
- 5월 26일 오후 5시, 윤상원 대변인은 여러 외신 기자들이 참여한 가운데 회견을 열었다. 회견 말미에 그가 "...우리는 오늘 패배하지만 내일의 역사는 우리들을 승자로 기억할 것입니다...”라고 했던 말은 현실이 되었다.
- 5월 27일 04시, 약 2만 명의 특수부대와 공수여단은 수류탄, M16 등 각종 살상 무기로 무장, 도청 진입 작전을 실시했고, 옛 전남도청 2층 민원실에 있던 윤상원과 동지들은 그들의 총격에 처참하게 사망하였다.
- 1982년 2월 20일 광주광역시 망월동 묘역에서 윤상원과 박기순의 영혼결혼식이 열렸다.
- 두 달 후 작가 황석영 의 집에서 두 사람의 영혼 결혼식을 기리는 창작 노래극 ‘넋풀이’(부제:빛의 결혼식)가 제작되었고, 이 극의 마지막을 장식한 노래가 바로 '임을 위한 행진곡'( 백기완 원작, 황석영 작사, 김종률 작곡)이었다.
관련 항목
의미관계망
이미지
동영상
지도
참고자료
Contextual Relations
| Source | Target | Relation | Attribute | Remark(Note) |
|---|---|---|---|---|
| 윤상원 | 전남대학교 | 모교 | ||
| 윤상원 | 김상윤 | 사회 운동 참여의 계기 | ||
| 윤상원 | 박관현 | 후배이자 사회운동 동지 | ||
| 윤상원 | 녹두서점 | 동지들과 교류한 곳 | ||
| 윤상원 | 들불야학 | 박기순의 권유로 강사로 활동 | ||
| 윤상원 | 광천동성당 | 야학 장소 | ||
| 윤상원 | 광천시민아파트 | 거주지 | ||
| 윤상원 | 5.18민주화운동 | 시민군 활동 | ||
| 윤상원 | 시민군 | 대변인 역할 | ||
| 윤상원 | 투사회보 | 야학 동지들과 함께 출판한 문서 | ||
| 윤상원 | 옛_전남도청 | 사망한 곳 | ||
| 윤상원 | 박기순 | 영혼결혼 부부 | ||
| 윤상원 | 임을_위한_행진곡 | 영혼결혼 헌정곡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