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학생운동
기본 정보
| 이름 | 광주학생운동 |
|---|---|
| 한자명 | 光州學生運動 |
| 발생지역 | 광주광역시 |
정의 및 개요
- 광주학생운동은 1929년 11월 3일 광주에서 시작해서 전국으로 확산된 일제강점기 최대 학생항일운동이었다.
특징
사건 전개
- 나주역에서 벌어진 일본 학생의 한국인 여학생 희롱 사건을 기점으로 11월 3일 가두시위가 시작됐다.
- 광주공립고등보통학교(현 광주제일고등학교) 3백여 명의 학생들이 시위를 시작하고 광주공립농업학교, 광주사범학교,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이 합세했다.
- 이들은 일제 경찰 및 소방대의 제지와 해산 명령을 무시하고 시위를 이어갔다. 일반 시민까지 합세한 후 금동 등지를 돌며 ‘조선독립만세’ 등을 외치다 이날 오후 광주고보로 돌아와 일단 해산했다.
- 일제의 휴교령 등으로 학생들의 움직임이 소강상태를 보인 가운데 성진회, 독서회 출신인 장재성은 광주 사회·청년단체 간부인 장석천과 만나 학생투쟁을 본격적인 항일운동으로 발전시킬 2차 투쟁을 준비했다.
- 이들이 주도하여 11월 12일, 시위참여 독려와 식민교육 철폐 등의 주장이 담긴 인쇄물 1,000여 장을 광주 시내에 뿌렸다. 광주고보와 광주공립농업학교 학생들은 시내 중심가인 광주충장로우체국과 광주형무소 앞까지 나가 함성을 지르며 제2차 학생운동을 전개했다.
- 학교 측의 저지로 시위에 참여하지 못한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은 다음날부터 동맹휴학에 들어갔다.
- 사태가 악화되자 일제는 대대적인 탄압에 나서 시위 참가 학생과 시민들을 구속했고, 250여 명에 가까운 학생들과 사회운동단체 간부들이 검거됐다.
- 구속된 학생들의 대부분은 퇴학, 무기정학 등 가혹한 처벌을 받았다. 일제는 언론을 통제하는 등 이 사건을 감추려 했으나 소문이나 전언을 통해 전국적으로 알려지면서 학생항일운동이 전국으로 퍼지는 계기가 되었다.
후속조치 및 영향력
- 일본 경찰의 단속에도 12월 9일부터 서울지역 학교들의 항일시위가 시작되었다.
- 경신학교, 보성고보, 중앙고보, 휘문고보 등 이 날 하루에만 1,200여 명의 시위 학생이 경찰에 체포되는 등 12월 13일까지 서울 지역에서만 1만 2,000여 명이 시위, 동맹휴학에 참여했다.
- 또 신간회의 주도로 광주학생운동에 대한 진상이 전국적으로 알려지면서 1930년 초까지 학생들의 항일시위가 이어졌다.
- 독립운동은 만주지역 한인 학교에까지 확대되었으며, 광주광역시교육청은 2006년 총 320개의 참여학교를 찾아냈다.
관련 항목
의미관계망
이미지
동영상
참고자료
Contextual Relations
| Source | Target | Relation | Attribute | Remark(Note) |
|---|---|---|---|---|
| 광주학생운동 |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탑 | 기념탑 | ||
| 광주학생운동 |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 | 기념관 | ||
| 광주학생운동 | 나주학생운동기념관 | 기념관 | ||
| 광주학생운동 | 성진회 | 항일학생단체 | ||
| 광주학생운동 | 독서회 | 항일학생단체 | ||
| 광주학생운동 | 학생투쟁지도본부 | 주도단체 | ||
| 광주학생운동 | 장재성 | 주도인물 | ||
| 광주학생운동 | 박준채 | 주도 학생 | ||
| 광주학생운동 | 나주역 | 사건발생장소 | ||
| 광주학생운동 | 광주사범학교 | 참여학교 | ||
| 광주학생운동 | 광주공립농업학교 | 참여학교 | ||
| 광주학생운동 | 광주공립고등보통학교 | 참여학교 | ||
| 광주학생운동 | 광주중학교 | 당시 일본인 학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