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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일전쟁과 음반 산업의 변화


1937년 7월에 발생한 중일전쟁은 우리나라 대중음악 산업에도 영향을 끼쳤다. 전쟁으로 인해 사회 전반의 분위기가 나빠지자 일제는 음반 검열을 강화하였다. 이 때문에 1938년에는 금지되는 음반이 크게 늘어났고 새로운 단속 규정도 마련되었다. 일제가 1937년에 설립한 ‘필름레코드 인정위원회’는 영화와 음반 등에 대한 적극적인 통제를 수행하였다. 이때 처음으로 친일 내용을 담고 있는 이른바 ‘군국가요’가 등장하였으나, 그 생산은 일시적인 현상으로 그쳤다.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음반 회사들이 군국가요를 발매하기는 하였으나, 이윤과 연결되지 않은 것이 그 원인으로 작용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전쟁 발발 후, 음반 산업이 위축되어 6대 음반 회사 중 한 곳이던 시에론 음반 회사가 1937년에 문을 닫았고, 군소 음반 회사들도 더 이상 음반을 발매하지 않았다. 또한 유일하게 한국인 자본으로만 운영된 것으로 알려진 뉴코리아 음반 회사도 이 무렵에 폐업을 한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오케 음반 회사는 일본 데이치쿠 음반 회사에 운영권을 양도하고 오케의 실질적인 운영자 역할을 하던 이철은 악극 쪽으로 방향을 전환한다. 이처럼 음반 산업이 주춤하게 된 것은 일본 음반 산업의 구조 조정이 우리나라에도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다.


전쟁의 여파로 사회적인 분위기가 어두워지면서 음반 산업이 주춤하는 양상을 드러냈으나, 그 와중에도 신인 가수들이 등장하여 대중음악계에 새로운 흐름을 만들기도 했다. 김영춘, 남일연, 박단마, 박향림, 송달협, 이인권, 장세정, 황금심 등이 활동을 시작했고, 작사가 이부풍과 작곡가 이재호, 이봉룡도 작품을 발표하였다.


1937년과 1938년 사이에 발매된 대표적인 대중가요를 보면, <연락선은 떠난다>, <물방아 사랑>, <해조곡>, <단장애곡>, <백만원이 생긴다면>, <짝사랑>, <눈물 젖은 두만강>, <왕서방 연서>, <오빠는 풍각쟁이>, <애수의 소야곡>, <알뜰한 당신>, <비오는 선창>, <나는 열일곱 살> 등을 들 수 있다. 이 중에는 오늘날까지도 애창되고 있는 곡들이 많다. 요컨대 중일전쟁의 여파로 음반 회사가 문을 닫고 음반 산업 자체가 위축되는 불안한 상황 속에서도 신인 가수와 인기곡은 지속적으로 나왔던 것이다.


일례로 백년설의 목소리로 1940년에 발매된 <나그네 설움>은 10만 장 가량 판매되었다고 한다. 실제로 1940년을 전후해서 한 해애 약 100만 장 정도의 음반이 판매되었다고 하니, 중일전쟁 이후에 잠시 주춤했던 음반 산업이 1939년부터 다시 성장세를 보였다고 할 수 있다. 특히 태평 회사가 대중음악 분야에 주력하면서 진방남, 고운봉, 백난아, 태성호 등의 신인 가수들을 배출하였다. 그러나 전시체제로 변하면서 사회 · 문화적 상황은 나빠져만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