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병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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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조선 말기 동학과 천도교의 지도자,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 1919년의 3.1운동의 주역인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만해 한용운 등과 함께 가장 인지도가 높다.


정보

  • 출생-사망: 1861.4.8 ~ 1922.5.19
  • 호: 의암
  • 별칭: 초명 응구, 후명 규동
  • 활동분야: 종교
  • 출생지: 충청북도 청주시 청원구 북이면 금암리
  • 주요수상: 건국공로훈장 중장(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1962)

생애

  • 12세: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관청에 공금을 내려고 가다가 눈길에 쓰러진 사람의 구휼비로 지급하는가 하면, 옥에 갇힌 친구 아버지의 석방을 위해 친구에게 자기 집의 돈 있는 곳을 알려줘 그 돈으로 친구 아버지를 풀려나게 한 적도 있었다.
  • 22세:1882년(고종 19) 큰조카인 손천민의 노력으로 평등사상을 내세운 동학[1]에 입도하였다. 입도 3년만에 제2세 교주 최시형(崔時亨)을 만나 착실한 신도가 되었다.
  • 1892년: 최시형 등 간부들과 함께 교조 최제우의 신원운동을 전개했고, 동학대표 40여 명은 서울 광화문 앞에서 복합상소를 하며 척왜척양을 호소했다.그들은 다시 충청북도 보은군에 모여 ‘보국안민(輔國安民)’과 ‘척왜척양’ 등 정부에 대한 본격적인 시위운동을 전개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최시형의 참모로서 크게 활약하였다.이 무렵 정부의 부정부패는 심화되었으며, 특히 고부군수 조병갑(趙秉甲)의 가렴주구에 대항해 동학접주 전봉준이 남접산하의 동학교도들과 함께 일대 항쟁을 전개하였다. 그 뒤 김연국의 뒤를 이어 북접통령(北接統領)이 되어 통령기를 받고 공주전투 등 항일구국전선에 나섰다. 또한 북접 산하 동학교도를 지휘, 통솔해 논산에서 남접의 전봉준과 합세하였다. 그러나 공주 우금치전투(牛金峙戰鬪)에서 패배해 남접과 헤어졌다. 이 후부터 최시형과 함께 충주 부근에 이르렀으나 12월 14일 개별적으로 행동하기로 하고 해산하였다. 그는 탄압의 영향이 적게 미쳤던 함경도와 평안도 지방으로 피신해 그곳의 교세 확장, 포교에 힘썼다.최시형에게 성실한 생활태도와 지략의 역량을 인정받아 의암이라는 도호를 받았다.
  • 1897년: 실질적인 제3세 교주로서의 일을 맡게 되었으며, 최시형이 체포되어 서울 감옥에서 처형된 뒤에는 마침내 교주가 되었다.
  • 1901년: 동생 손병흠,이용구와 함께 일본 나가사키를 거쳐 오사카에 머물렀다. 그러나 간신배들의 책동이 두려워 그 해에 상해로 가서 수 개월을 지내며 미국행을 시도했으나 좌절되고, 다시 일본으로 되돌아갔다. 일본에 이미 망명해 있던 권동진,오세창,조희연,이진호,박영효 등과 만났으나, 가명을 썼으므로 누구도 알아보지 못하였다. 망명생활 중 본국과 연락하면서 교세의 재건에 힘쓰면서 교도들에게 새로운 문명학술을 배우게 하고자 일본유학을 알선해 유학생이 상당히 나왔다.
  • 1904년:러일전쟁이 일어나자 국내의 교도들에게 진보회를 조직하게 하여 조직체계를 강화하였다. 그리고 교도의 교양을 위해 「삼전론(三戰論)」을 발표하고 의정대신과 법부대신에게 글을 보내어 정치개혁을 주장하였다. 진보회는 지방회원이 11만명에 달하는 큰 단체로 발전한다.[2] 그러나 이 단체가 동학교도인 것을 알게 되자 정부에서도 1894년 동학농민봉기 당시를 생각해 일본측과 교섭, 이를 탄압하므로 어려움에 직면하게 되었다. 귀국 후 천도교의 조직과 교세 확장에 힘쓰며 친일 배교한 이용구 일파까지도 회유 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용구는 일진회에 속한 천도교인들의 포섭공작을 펴면서 손병희를 중상모략하며 천도교의 파괴를 꾀하였다.
  • 1906년: 이에 일제를 배경으로 하는 일진회와 맞서는 것이 여러모로 불리함을 깨닫고, 9월 17일 자신이 가장 신임하고 재정문제까지 맡아 처리하던 이용구 이하 62명에 대해 동학으로부터 출교처분을 내렸다.
  • 1907년: 손병희는 일선에서 물러나고 대도주의 직을 김연국에게 물려주었다. 그러나 김연국은 대도주의 직을 지닌 채 평소 비난하던 시천교의 대례사로 취임하였다. 이렇게 되자 손병희는 1908년 1월, 박인호에게 대도주의 직을 맡게 하였다.
  • 1910년:사동(寺洞) 중앙교당 옆에 창신사(彰新社)를 설립해 『천도교월보』 제1호를 내고 뒤이어 보성사와 병합해 보성사로 하고 시설을 확충하였다. 한때 일제의 탄압으로 운영난이 심각했지만 잘 극복하였다. 우리 나라를 강점한 일제가 일진회의 활동을 금지, 해산시키자 시천교도 급속도로 약화되었다. 또한 일제는 천도교의 교세 확장을 막기 위해 손병희를 헌병대에 소환하고, 천도교의 재원인 성미법을 폐지하려고 하였다.
  • 1918년: 민족자결주의의 영향과 연합국의 승리에 의해 국제정세가 한국독립에 유리해졌다. 이에 권동진,오세창과, 1919년 일본 동경의 2·8독립선언에 접한 최린,권동진,오세창이 협의하면서 독립운동을 거국적으로 벌이기로 하였다. 손병희는 천도교측의 대표로 3·1운동의 주동체로 참가, 그 해 1월 20일경 권동진,오세창,최린 등과 함께 독립운동은 대중화해야 하고, 일원화해야 하며, 비폭력으로 진행하기로 합의하였다. 구체적 방법과 진행은 권동진,오세창,최린,정광조에게 일임하였다.
  • 1919년: 2월 27일 밤 천도교 직영의 보성사에서 독립선언문 2만 1000매를 인쇄, 이튿날 가회동 자신의 집에 민족대표 23명이 모여 다음날 거사를 재확인하였다. 그리고 파고다공원에서 독립선언식을 할 경우의 불상사를 염려해 파고다공원 부근 태화관에서 기념식을 거행하기로 하였다.
  • 1920년 이후: 3월 1일 기념식을 거행한 뒤 일본경찰에 자진 검거되어 1920년 10월 징역 3년형을 언도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 중, 1년 8개월만에 병보석으로 풀려나 상춘원(常春園)에서 치료하지만 사망했다.
  • 1962년: 건국공로훈장 중장[3]이 추서되었다.

업적

  • 보성전문학원 인수: 동학농민혁명이후 일본으로 망명했던 손병희는 근대화된 일본에 신선한 충격을 받았고, 박영효를 비롯한 개화 인물과 교류하며 교육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성주현(숭실대 HK+사업단)교수는 “손병희는 일본에서 교육이 국가의 존망을 결정하는 중대한 요소임을 알게 됐다”며 “재정난을 겪고 있던 국내 학교들을 많이 지원했다”고 말했다. 실제로 손병희는 귀국한 직후인 1906년 3월, 보성전문학원에 80원을 기증하기도 했다. 1910년 7월부터 보성전문학원 교장 대리직을 맡은 천도교인 윤익선은 재정난에 허덕이던 학교를 다시 일으키고자 천도교주 손병희에게 보성학원의 인수를 부탁했다. 결국, 1910년12월 손병희가 보성학원을 인수하면서 경영난이 조금씩 해소되기 시작했다. 특히 천도교의 헌납 제도인 성미[4]는 보성을 지탱하는 기둥이었다. 성주현 교수는 “천도교인들은 주로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않은 농민들이었음에도, 300만 명 교인들의 성미를 통해 사립학교를 지원할 수 있었다”며 “말 그대로 십시일반”이라고 설명했다. 이로써 보성전문은 민족교육의 내실을 위해 새로운 교수진을 확보하는 등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일제는 1910년 경술국치를 기점으로 천도교와 보전을 더욱 강하게 억압했다. 조선 최초의 사립전문학교였던 보성학원이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것에 위기를 느낀 탓이다. 일본 헌병대가 위협을 가해 성미제가 3년간 중단되기도 했으며 손병희를 폄훼하는 선전이 지속적으로 펼쳐졌다. 또 식민 지배를 받는 조선인은 실업 공부만으로도 족하다며 교명을 ‘사립 보성법률상업학교’로 격하시켰다. 일제의 탄압은 1919년 3.1운동까지도 계속됐다.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이었던 손병희와 보전 교장 최린이 투옥되면서 보전은 또다시 난관에 봉착하게 됐다.
  • 민족대표 33인: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면서 천도교, 불교, 개신교 등 종교계 인사들이 포함된 민족대표 33인은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종교계 간 화합을 이루었고 3.1운동을 참여했다는 점에서 의의를 지닌다.

기타

  • 고려대학교 문과대학 서관 앞에는 고려대학교의 재정난을 극복하고 민족교육의 내실을 기르게 해 준 그의 공을 기리기 위해 그의 흉상이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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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동영상


논저

  • 「수수명실록(授受明實錄)」
  • 「도결(道訣)」
  • 「명리전(明理傳)」
  • 「 천도태원설(天道太元說)」
  • 「대종정의설(大宗正義說)」
  • 「교(敎)의 신인시대(神人時代)」
  • 「무체법경(無體法經)」
  • 「성심신삼단(性心身三端)」
  • 「신통고(神通考)」
  • 「견성해(見性解)」
  • 「삼성과(三性科)」
  • 「삼심관(三心觀)」
  • 「극락설(極樂說)」
  • 「성범설(聖凡說)」
  • 「진심불염(眞心不染)」
  • 「후경(後經)」
  • 「십삼관법(十三觀法)」
  • 「몽중문답가」
  • 「무하사」
  • 「권도문」
  • 「삼전론」
  • 1860년 최제우가 창시한 민족 종교로 기일원론(氣一元論)과 후천개벽(後天開闢) 사상, 인내천(人乃天) 사상을 특징으로 한다. 2대 교주인 최시형이 교단과 교리를 체계화하였다. 1894년 농민전쟁에 큰 영향을 끼쳤으며, 1905년 천도교(天道敎)로 개칭하였다.
  • 390여 개의 지회조직을 비롯해 30여 만명이 머리를 짧게 자르는 운동을 실천하는 등 생활개선에 앞장서 관민을 놀라게 하였다.
  • 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 성미는 천도교인들이 밥을 지을 때 식구 수대로 쌀을 한 숟가락씩 덜어내 한 달 동안 모은 뒤 천도교 중앙총부에 납부하는 방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