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삼양동금동관음보살입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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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삼양동금동관음보살입상.jpg

정의

국보 제 127호[1]로, 삼국시대에 제작된 관세음보살상이다.

조성

조성 시기는 7세기 초 삼국시대로 추정된다. 살이 올라 통통해진 얼굴과 신체, U자형으로 늘어진 이중의 천의, 끝이 누그러진 군의 자락 등은 조성 시기를 7세기 초로 추정하게 한다. 그러나 삼국시대 당시 서울은 그 소유국가가 자주 변동되었던 중부 지방의 중심지이자 요충지였기 때문에 제작 국가를 확정짓기 어렵다. 조성 시기가 7세기 초로 추정되기 때문에[2], 신라의 불상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인 듯하나, 불상 제작 양식을 통해 백제의 것으로 보기도 하는 등 의견이 분분하다. 불상은 구리로 주조하여 금으로 도금하였다[3]. 높이는 약 20cm에 달한다.

발견

1967년 서울시 도봉구 삼양동에서 발견되었다. 당시 삼양동의 국유지에 천막을 치고 살던 주민 박용출씨가 발견자이다. 그는 1967년 1월 집 뒤의 산비탈이 무너져 온 식구가 깔려죽는 꿈을 꾸었다. 때문에 1월 28일, 천막집 뒤쪽에 하수도를 깊이 파던 중 흙 속에서 금동보살을 발견했다. 불상의 발견을 신고받은 문화재 관리 당국은 박용출씨에게 120만원의 보상금을 지급했다.[4]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설명

서울 삼양동 금동관음보살입상은 단판복련자 위에 똑바로 선 자세를 취하고 있다.

머리 위의 보관(寶冠)은 삼각형의 삼면관(三面冠)이다. 중앙의 앙련좌(仰蓮座) 위에는 결가부좌(結跏趺坐)한 화불(化佛)이 새겨져 있다. 또한, 오른손은 허리 근처에서 입체적인 정병을 들고 있으며, 왼손은 위로 올려 엄지와 검지를 V자형으로 곧게 편 특징적인 모습이다. 이러한 보관의 화불과 계인관세음보살의 도상적(圖像的) 특징이다.

얼굴은 살이 올라 통통한 둥근 얼굴이다. 지그시 감은 긴 눈은 부은 듯 융기되었다. 눈썹에서 이어진 콧날은 유난히 날카롭게 강조된 반면, 턱선은 거의 사라져 둥글게 표현되었고 입은 아주 작고 엷은 미소가 서려 있다. 귀는 평판적인 넓은 타원형이다. 양어깨 너머로 드리워진 수발[5]은 나뭇잎 형태로 마무리되었고 그 끝에 얕은 꽃무늬가 표현되었다.

목의 삼도(三道)는 보이지 않는다. 상체는 어깨가 좁아 위축된 모습이며, 가슴을 앞으로 내밀어 통통한 타원형을 이루었다. 따라서 신체는 후굴(後屈)의 자세를 이루고 있다. 가슴에는 널찍한 꽃 모양의 목걸이를 걸쳤다. 상체에는 양어깨를 덮고 있는 숄형의 천의가 돌려져 있다. 가슴 사이로 비스듬히 걸친 내의(內衣) 자락이 보인다. 천의는 배와 무릎 근처에서 이중으로 걸쳐 U자형으로 늘어져 있다. 하체의 군의 자락은 몇 줄의 선으로 간략화되어 있다. 다시 말해, 군의를 두껍게 입혀서 다리의 윤곽이 뚜렷하지 않으며, 옷주름은 몇 가닥의 판상의문(板狀衣文)으로 단순화되어 있다.

불상의 뒷면은 편평한데, 뒷머리에는 두광배(頭光背)를 꽂았던 광배의 촉 자국이 뚜렷하게 보인다. 대좌는 고식(古式)의 단판복련좌(單瓣覆蓮座)이다. 대좌의 꽃잎은 끝과 판심(瓣心)이 뾰족해 보살상의 부드러운 모델링에 비하여 예리함이 강조되어 있다.

주석

  1. 1968년 국보로 지정되었다.
  2. 6세기 중엽, 신라 진흥왕 15년(554)에 서울 지방은 신라의 영토로 확정되었다.
  3. 일명 금동
  4. '매장문화재보호 및 조사에 관한 법률’(제17조와 21조 등)과 '유실물법'(제13조) 등은 ‘발견 유물은 신고는 7일 이내에 신고해야 하며, 발견자와 신고자, 토지 및 건물소유자에게 보상금을 균등하게 지급한다’고 규정
  5. 垂髮: 뒤로 길게 늘어뜨린 머리

참고자료

[1] [2] [3]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