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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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1910년 경술국치 전후로, 한반도 및 세계 각지에서 전개된 한국(대한민국)의 독립운동에 대해 간단히 다루는 문서이다

분야별 독립운동 양상

무장 투쟁 운동

1. 항일 무장 단체 및 독립군

의열단, 한인애국단 등 우리에게 익히 알려진 무장 단체들은 여러 의거(義擧)활동으로 우리 민족의 독립 정신을 고취시키고 알리는 역할을 하였다. 1931년 김구가 창설한 한인애국단은 이봉창과 윤봉길 의사가 일제 고위층 인사를 암살하려 시도하는 등 적극적으로 무장 투쟁에 나섰다. 이외에도 신흥무관학교와 조선혁명군사정치학교 등은 교육기관의 역할도 수행하였지만, 기본적으로 군사를 교육하는 곳이었기에 무장 투쟁 활동에도 참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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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군은 주로 만주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이들은 주로 만주 지역을 통해 세력을 확장하거나, 독립군을 진압하러 진격해 온 일본군을 지형지물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거나 게릴라전의 형태로 무찔렀다. 홍범도 장군이 이끄는 한국 독립군이 봉오동에서, 김좌진 장군의 부대가 청산리에서 일본군을 크게 격파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들 역시 한반도와 세계 만방에 조선의 독립의지를 알리고, 일본군의 전력을 분산시키는 등의 업적을 남겼다. 이외에도 신흥무관학교로 대표되는 군 양성기관을 설립하여 간부를 육성하기도 하여 향후 독립군 외 항일 무장 투쟁의 근간을 마련하는 데 기여하였다.

애국 계몽 운동

주로 경술국치 이전에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보안회는 러시아의 황무지 개간권을 철회시켰고, 대한 자강회는 교육 진흥활동 및 고종황제 퇴위 반대 운동을 전개하다 일본에 의해 강제 해산되었다. 특히 신민회는 오산학교와 대성학교 등의 신식 학교를 설립하는 등의 교육 활동과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하는 등의 언론 활동, 그리고 국외에 독립 운동 기지를 건설하는 등 다양한 방면에서 국민들의 독립 의식을 고취시키는 활동을 하였다.

문화 진흥 운동

나운규는 한국 최초의 영화 아리랑을 제작하였고, 언어 연구 분야에서도 조선어학회가 창설되어 우리 민족 혼의 근본인 언어를 수호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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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적 구국 운동

1907년 대구 지역을 중심으로 일본으로부터 진 빚을 갚기 위해 국채보상운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 등의 언론이 적극적으로 홍보에 나섰고, 황제부터 일반 백성들까지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참여한 경제적 구국 운동이었다는 의의를 갖는다. 경술국치 이후에는 평양 지역을 중심으로 외제 물건보다는 우리가 만든 물건을 적극적으로 이용해 민족적/경제적 자주성을 지키자는 물산 장려 운동이 이루어 졌다.

의의

우리 민족의 독립의지를 확실히 보여주었고, 이를 통해 민족 통합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또한 임시 정부와 같은 근현대적 체제를 도입함으로써 해방 이후의 새로운 건국 과정의 기반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