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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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열

요약

대한민국의 의거 학생으로, 이승만 독재 정권 타도와 민주주의 쟁취를 위해 일어났던 1960년 3·15 의거 과정에서 경찰이 쏜 최루탄에 희생되었다. 3월 15일 시위 당일 실종되었는데, 이후 눈에 최루탄이 박힌 그의 시체가 4월 11일 마산만 중앙 부두에서 떠올랐다. 이는 이승만 정권에 대한 국민적 공분을 일으켜, 이로 인해 제 2차 의거가 일어났고,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사망 경위

1960년 3월 15일 정·부통령 부정선거를 계기로 의거가 발발하였다. 마산시청, 남성동 파출소, 북마산 파출소 앞에서 경찰의 무차별 발포로 8명이 사망하고, 100여 명이 총상을 입었으며, 수 백 명이 부상당하고 체포 구금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김주열(金朱烈)[1944~1960]은 희생되었다. 당시 김주열은 마산 상업 고등학교 입시를 치르고 남원으로 갔다가 합격자 발표를 앞두고 형 김광렬과 함께 마산으로 왔다. 합격자 발표일이 3월 14일이었으나 3·15 선거를 앞두고 군중이 모이는 것을 꺼린 교육청에서 합격자 발표 연기를 종용했기 때문에 16일로 연기되었다. 이것이 김주열이 3·15 의거 과정에서 시위대에 합류하게 되고 희생당하게 된 이유이다. 마산 상업 고등학교 입학 시험 합격자 발표일 하루 전인 1960년 3월 15일에 형 김광열과 함께 이승만 정권의 3.15 부정 선거를 규탄하는 마산 시위에 참여하였다가 실종되었다. 실종 27일 후인 4월 11일 마산 신포동 중앙부두 앞바다에 그의 시신이 떠올랐다. 시신의 얼굴 눈 부위에는 탄피가 알루미늄으로 된 최루탄이 박혀 있었다. 이 최루탄은 3월 15일 경찰이 시위 진압을 위해 군중을 향해 쏜 것이었다. 시위 진압 후 김주열의 시체를 발견한 경찰은 그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시체를 차에 싣고 마산 앞바다에 유기하였다.

4.19 혁명에 미친 영향

김주열은 의거 과정에서 행방불명되었고, 어머니가 마산으로 와서 찾아 헤맸지만 찾지 못했다. 4월 11일 마산의 중앙 부두에서 경찰이 쏜 최루탄이 눈에 박힌 채 시체로 떠올랐다. 4월 11일 오후 시신 발견 소식을 전해 들은 마산 시민들은 시신이 안치된 마산도립병원으로 몰려갔고, 김주열 시신을 목격한 마산 시민들은 분노했다. 이로 인해 2차 의거가 일어났으며, 오후 6시경부터는 거리에 시위대가 형성되었다. 시위대는 “죽은 내 자식을 내놓아라.", "살인 선거를 물리치자.", "살인범을 잡아내라.", "선거 다시 하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마산 시내의 경찰서와 파출소, 시청과 관공서, 자유당 마산시당부, 서울신문사 마산지사 등을 습격하였다. 이렇게 김주열의 시신이 발견된 4월 11일부터 시작된 제 2차 마산 의거는 전국적 민주 항쟁인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4.19 혁명의 결과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했다는 점에서 김주열의 죽음은 이승만 정권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