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알지신화
탈해 이사금 脫解 尼師今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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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 탈해 이사금 脫解 尼師今 |
신상정보 | |
이름 | 석탈해 |
별호 | 탈해 이사금 |
원어 이름 | 脫解 尼師今 |
국가 | 신라 |
재위 기간 | B.C. 19년 또는 B.C. 5년 (음력) |
출생 | B.C. 58년 4월 (음력) |
사망 | A.D. 80년 8월 (음력) (향년 85세 혹은 99세) |
부친 | |
모친 | 용성국 왕후 |
배우자 | 남해왕의 맏딸 |
정의
신라 제4대 왕이며 석씨 왕조의 시조가 된 탈해에 관한 신화이다.
역사
『삼국유사(三國遺事)』 「기이(紀異)」 탈해왕 조와 『삼국사기(三國史記)』 「신라본기」 탈해이사금 조가 주된 자료이나, 『삼국유사』 「가락국기」에도 ‘탈해왕과 김수로왕의 왕위 싸움’에 관한 부분이 기록으로 남아 있다.
줄거리
『삼국유사』 탈해왕 조 기사를 중심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남해왕 때 아진포에서 혁거세왕에게 해산물을 바치던 아진의선(阿珍義先)이라는 노파가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바다에서 까치들이 떼를 지어 날며 울고 있는 것을 보았다. 이상히 여긴 노파가 살펴보았더니 거기에 배 한 척이 있었고 배 안에는 큰 궤짝이 있었다. 궤를 열자 그 속에 단정하게 생긴 한 사내아이와 여러 보물과 노비들이 들어 있었다. 그 사내아이를 7일 동안 보살펴 주자, 스스로 입을 열고 말하기를 "나는 본디 용성국(龍城國) 사람이다. 그 나라의 왕비에게서 알로 태어났으나 버림을 받아 이곳에 닿았다." 라고 하였다. 아이는 말을 마치자 지팡이를 끌고 두 사람의 종(從)을 데리고 토함산에 올라가 돌무덤을 파고 7일 동안 머물렀다. 이후 산을 내려와 성 안을 살펴 살 만한 곳을 찾던 중 호공(瓠公)의 집에 다다랐다. 아이는 속임수를 써서 호공의 집 곁에 숫돌과 숯을 묻고 다음 날 아침 관가에 가서 그 집은 자신의 조상이 대대로 살았던 집이었는데 자신이 잠시 집을 비운 사이 호공이 들어와 차지한 것이라고 고발했다. 아이는 전날 묻어두었던 숫돌과 숯을 증거로 제시하여 그 집을 차지하게 되었고 그 소문이 퍼지자 남해왕은 아이(탈해)가 슬기로운 사람이라 생각하여 아이를 그의 맏사위로 삼았다. 이때 석탈해가 남해왕의 사위가 된 것은 훗날 그가 왕위에 오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탈해가 동악(東岳, 토함산)에서 내려오는 도중에 백의에게 물을 떠오라 하였는데, 백의가 요내정에서 물을 떠오다가 먼저 그 물을 마시자, 물그릇이 입에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탈해가 꾸짖고 백의가 사죄하니 그릇이 떨어졌다. 그 후로 백의가 두려워 속이지 않았다. 노례왕을 이어서 탈해가 왕이 되었지만, 왕에 오른 지, 23년 만에 죽어 소천구(疏川丘)에 모셔졌다. 훗날 신조(神詔, 탈해 신령의 말)로 뼈를 묻었는데, 그 크기가 역사(力士)의 뼈였다. 이에 뼈를 부수어 소상(塑像)을 만들어 대궐에 모셨다. 다시 신령의 말에 따라 그 상을 동악에 봉안하였고, 나라에서 계속 그를 동악신으로 모셨다.
분석
이 신화에는 고대의 역사 민속과 고고학 자료가 부족하기 때문에 풀어야 할 몇 가지 문제가 존재한다.
①석탈해와 그 집단의 출신과 문화적 성격이다. 탈해의 출생지가 왜의 동북 1천리에 있는 용성국이며, 그곳에 28명의 용왕이 있다거나, 그 모친이 적녀국(積女國)의 왕녀라 하였고 또한 탈해는 붉은 용이 호위하는 배를 타고 가야의 남해를 거쳐 계림(곧 신라) 동쪽 해안 하서지촌에 상륙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는 탈해 집단이 해양문화를 가지며 출생 원천이 물(바다)과 친연성이 깊다는 점을 나타내며, 한국 고대신화에서 천상에 근본을 둔 신화 말고도 물이라는 신성한 초월계를 상정한 신화가 존재함을 보여 준다. 탈해의 출신지 기록에 근거하여, 동북 시베리아의 어로문화를 가진 집단이 해류를 따라 동해안을 거쳐 경주 지역으로 이동하여 왔으며, 선진 청동기 내지 철기문화를 가졌을 것이라는 주장도 제기된다.
② 탈해가 숫돌과 숯을 몰래 묻어 남의 집을 빼앗은 속임수이다. 우선, 탈해가 '사술(詐術)을 통한 지능의 과시'로 호공과 겨루어 집을 빼앗고, 이 때문에 남해왕의 사위가 되며 나아가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는 것은, 그와 같은 '지능겨루기'가 왕위 등극의 전제였음을 시사한다. 아울러 그에 앞서 있었던 ‘토함산 돌무덤 속에 7일간 머물기’를 ‘상징적 죽음과 재생’으로 파악한다면, 이러한 ‘지능겨루기’는 결국 ‘입사식의 시련’이라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이 같은 추정은 석탈해가 왕위를 놓고 수로왕과 ‘둔갑겨루기’를 하고 있다는 자료에 의하여 뒷받침된다. 또한, 동명왕의 아버지인 해모수가 유화와의 혼인을 허락받기 위하여 신부의 아버지와 ‘둔갑겨루기’를 하고 있음을 방증으로 삼을 수도 있다.그렇다면 「석탈해신화」 속에는 왕위 등극의 전제가 된 두 가지 겨루기가 존재하고 있는 셈이다. 하나는 ‘지능겨루기’이고 또 하나는 ‘둔갑겨루기’인데, 전자와는 달리 후자를 육체적 표현을 통한 잠재적 능력 겨루기라고 표현함으로써, 두 가지 겨루기를 대립적이면서 상호 보완적인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③ 탈해가 자신을 본래 ‘대장장이’라 한 것으로 보아, 탈해는 새로운 철기문화를 가진 집단의 우두머리이다. 더욱이 시베리아 사회에서 금속, 철기, 무기들의 주술적 힘을 가진 대장장이가 샤먼(무당)과 밀접한 관계를 지니며, 신라 2대 남해왕이 차차웅 곧 무당의 성격을 지녔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결국 탈해는 야무왕(冶巫王)의 성격을 지닌 것으로 보인다.
④ 석탈해 사후(死後)의 기록은 민속학에서 매우 중요하다. 탈해의 골상이 역사처럼 거대하며, 신령으로 현몽하여 이중장(二重葬)을 치르게 하고, 시신의 뼈를 소상으로 만들어 토함산에 봉안하여 동악신이 되고, 대대로 나라의 제사를 받게 되었다고 하였다. 이중장은 고대부터 기원이 오래된 것으로 조상숭배 관념, 뼈 속에 영혼이 깃든다는 조상유골 관념과 관련이 있다. 특히, 뼛가루로 빚어 만든 죽은 이의 상은 시베리아 지역 샤머니즘에서 볼 수 있는 ‘온곤’에 비교될 수 있는 만큼 매우 뜻 깊은 자료라고 생각된다. 탈해가 사후에 토함산 산신으로 좌정한 것은 산신이 원래 여성이었다가 점차 남성으로 변하고 있음을 말해 준다. 『삼국사기』에는 그 일이 태종무열왕 때 일어난 것으로 되어 있는데, 토함산이 국방의 요충지로서 국가의 제사처인 오악의 하나라는 점을 고려하면, 탈해의 산신화는 무력이 중시된 삼국전쟁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모티프
석탈해신화는 천손하강 모티프로 이루어져 있다. 석탈해의 출생의 원천이 물(바다)속이라는 사실은 우리 신화에서 신의 신다운 출생 원천이 하늘과 물 두 곳임을 말해 주는 증거의 하나이다. 용성국 혹은 용왕이라는 표현으로 보아 석탈해의 출생 원천이 용궁다운 모습을 지니고 있으나, 중요한 것은 하늘과 더불어 물 (바다)속이 신성한 초월적 세계로서 관념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또한, 석탈해신화는 난생설화 모티프로 이루어져 있다. 궤를 열자 나온 사내아이가 본인은 사실 용성국 사람이고 왕후의 자식이지만 알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버려졌다는 말에서 알 수 있다. 건국신화에 등장하는 왕들처럼 난생설화를 모티프로 사용해 석씨 왕권의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의의와 평가
<석탈해신화>는 신라의 건국신화가 아니라 석씨 왕가의 시조신화로, 이와 유사한 것은 김씨 왕가의 시조신화인 <김알지신화>가 있다. 아울러 신라 육촌장신화와 함께 성씨시조신화에 해당한다. 그럼에도 이 신화는 건국시조신화 못지않게 중요하다. 탈해가 야무왕의 성격을 지니고, 고대국가 초기에 왕과 샤먼이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보여주고, 사후의 이중장 및 남성 신격의 산신화라는 민속적 사례를 제공하여 한국 서사문학상 풍부한 내용의 ‘영웅의 일생’이라는 전기구조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세계 영웅신화의 보편적인 서사구조에 해당한다.
석탈해 일대기
(타임라인)
석탈해 신화 발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