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국준비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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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송윤 (토론 | 기여)님의 2025년 12월 21일 (일) 05:59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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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조선건국준비위원회의 깃발.png ☜건국준비위원회와 그 당시 세우려 했던 독립국가 계획인 조선인민공화국의 깃발 등으로 제안된 '태극기'

  •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패망과 함께 해방 직후 여운형을 중심으로 조직된 정치 단체로, 해방된 조선을 질서 있게 자주적으로 건국하기 위한 준비를 목표로 했다.
  • 1945년 해방과 함께 조직된 최초의 건국준비단체. 약칭 ‘건준(建準)’.
  • 1945년 8월 15일~1945년 9월 6일
    10월 6일 개최된 건준 중앙집행위원회에서 해체 의견이 다수를 이뤄 이 날 정식으로 건준은 해산되었다.

설립 과정

  • 일제의 갑작스러운 항복 후 조선 전역에 혼란과 권력 공백 발생
  • 치안 유지와 행정 기능을 조선인의 손으로 운영할 필요성 대두
  • 총독부와의 사전 교섭을 통해 정치범 석방 및 치안 이양 논의가 진행됨

활동

치안 유지

  • 해방 직후 치안대(자위 조직)를 운영하여 사회 혼란을 최소화하려고 하였다.

행정 기반 구축

  • 미군정 도착 전까지 임시 행정 기능 일부 수행하였다.
  • 식량 배급, 노동 관리, 일본인 재산 정리 등을 하였다.

정치 활동

  • 조선인의 자주적 임시정부 수립 목표
  • 9월 6일 ‘조선인민공화국’ 선포에 관여(다만 건준 내부 의견 차이로 통제력 약화)

해방 직전 총독부–여운형 교섭에 대한 학설

1. 질서 이양을 위한 불가피한 협상설

이 견해는 여운형이 일본 총독부와 접촉한 것은 조선 사회의 혼란을 최소화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본다. 총독부가 사실상 통치 능력을 상실한 상황에서, 조선인 지도자가 질서 이양을 준비하는 것은 현실적 대응이었다는 평가이다. 이 관점에서는 교섭을 ‘협력’이 아니라 ‘관리된 이행’으로 해석한다.

2. 정치적 타협이자 전략적 선택설

이 시각은 교섭을 여운형의 전략적 정치 행위로 본다. 즉, 총독부와의 접촉을 통해 행정·치안 권한을 확보하고, 해방 직후 주도권을 장악하려 했다는 해석이다. 이 경우 교섭은 민족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해된다.

3. 친일 협력으로 오해될 소지가 있다는 비판적 시각

일부에서는 총독부와의 교섭이 결과적으로 정치적 오해를 낳았으며, 여운형과 건국준비위원회의 정당성을 약화시키는 요인이 되었다고 비판한다. 이 관점은 해방 직후 좌우 대립 속에서 해당 교섭이 정치적으로 이용되었다는 점에 주목한다.

4. 구조적 한계론

이 해석은 교섭의 도덕성 여부보다, 당시 조선이 처한 구조적 제약을 강조한다. 즉, 외세의 군정이 예정된 상황에서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완전한 자주적 이행은 불가능했으며, 교섭 논쟁 자체가 사후적 평가라는 입장이다.
→ 이처럼 총독부–여운형 교섭은 단일한 해석으로 규정되기보다, 상황·의도·결과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다층적으로 이해될 필요가 있다.

해체 과정

945년 9월 미군이 남한에 진주하면서 미군정이 공식적으로 시작되었다. 미군정은 건국준비위원회를 독자적 통치 기구로 인정하지 않았고, 점차 그 기능을 제한하였다. 이후 건국준비위원회는 조선인민공화국로 재편되었으나, 이 역시 미군정에 의해 인정받지 못하면서 사실상 해체의 길을 걷게 되었다.

평가



긍정적 평가 부정적 평가
한국인 주도 자치 시도의 출발점, 혼란 속 치안 유지 기여 조직력 부족, 이념 갈등 심화, 미군정과 협력 실패

역사적 의의

  • 한국인이 주체가 되어 해방 정국을 이끌려는 최초의 국가 건설 시도
  • 좌우합작 움직임의 출발점으로 평가
  • 명확한 합법성과 정통성 확보에는 실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