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육사의 기자 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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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육사의 기자생활

출소한 뒤에는 중외일보와 조선일보 대구지국에서 기자로 일했고, 1930년에는 ‘이활’이라는 이름으로 첫 시 <말>을 조선일보에 발표했다. 이 시기는 훗날 교보생명을 세우는 신용호에게도 영향을 주어 독립운동 자금 지원과 교육 사업 구상에도 영향을 끼쳤다고 알려져 있다.

1930년, 이육사는 조선일보 지면을 통해 생애 첫 시 「말」을 발표하며 문단에 모습을 드러냈다. 1월 3일자 조선일보 7면 하단에 실린 이 짧은 작품에서 그는 매질에 지쳐 쓰러질 것 같은 말이지만 새해에는 다시 우렁차게 질주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이 작품이 바로 그와 조선일보의 첫 연결고리였다.

중외일보 대구지국

시 발표 후 그는 중외일보 대구지국에서 기자 일을 시작했고,

조선일보 대구지국

1931년 8월에는 조선일보 대구지국으로 자리를 옮겼다. 당시 지국은 지방 취재의 중심이었고, 이육사가 조선일보에서 처음으로 이름을 걸고 쓴 기사도 이곳에서 나왔다. 바로 1932년 1월 14일부터 네 차례 연재된 「대구의 자랑 약령시의 유래」라는 글이었다. 당시 그는 ‘육사생(肉瀉生)’이라는 독특한 필명을 썼다.

이육사가 조선일보 대구지국 기자로 근무하면서 쓴 1932년 1월 14일 자 ‘대구의 자랑 약령시의 유래’ 기사. ‘육사생’이란 필명 사용. ⓒ 조선일보

그는 스포츠 기사에서도 민족적 정서를 드러냈다. 1932년 3월 6일과 9일자 스포츠란에서 「대구 ‘장’ 연구회 창립을 보고서」라는 글을 연속으로 기고하며 이번에는 ‘이활(李活)’이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여기서 그는 조상 대대로 이어오던 우리 겨레의 전통 놀이 ‘장치기’를 소개하며 경기 방식뿐 아니라 점수 계산 용어까지 온전히 우리말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더 나아가 이 놀이를 세계 농민 사회에까지 널리 보급하자고 주장했다.

그는 1934년 무렵 조선일보로 다시 합류했고, 이후에도 꾸준히 조선일보 지면에 글을 남겼다. 1930년대 후반에서 신문이 폐간되기 직전인 1940년까지 발표된 글들은 다양했다. 5회 연재된 「노신 추도문」(1936년 10월 23~29일자), 「문외한의 수첩」(1937년 8월 3~6일자, 3회), 「황엽전」(1937년 10월 31일~11월 5일자, 4회), 「전조기」(1938년 3월 2일자), 그리고 1940년 발표된 「계절의 오행」 등이 대표적이다.

타임라인으로 보는 이육사의 기자 발자취

대구(大邱)의자랑 약령시(藥令市)의유래(由來)

대구(大邱)의자랑

약령시(藥令市)의유래(由來)

대구지국(大邱支局) 육(肉) 사(瀉) 생(生)

대구의자랑이 무엇이냐?고 뭇는사람이 잇스면 지금사람들은아이어룬할것업시 대구능금(평과(苹果))을말할것이다 그러나 대구능금은 최근의 한명산물로서완전한 자랑의자위를 점령할수는업는것이다 여긔서우리는중학교지리교과서(중학교지리교과서(中學校地理敎科書))에도잇는대구의유명한약령시(연령시(燕令市))를자랑으로들어놋코그에대한력사적유래를먼저아라보자

◇약령시(藥令市)의사적유래(史的由來)

대구의 약령시는 일년얼차의정긔시장으로서 그시장에 집산되는 산물은 맛치『도루고』(토이기(土耳其))나『코—카쓰』(고가삭(高加索))나중앙아세아(중앙아세아(中央亞細亞))내외몽고(내외몽고(內外蒙古))등지에서 일년 일차혹이차식 열니는 모피물(모피물(毛皮物))의시장과가티대성황을일우나 이상에말한 각지의시장은인류사회의생활형태가차차목집함을따라필요한물품을서로서로밧구고저일정한장소와시일에모히는말하자면물물교환(물물교환(物物交換))시대로부터교통의관계라는지긔후의관계라든지또는일반사희생활의형태가오히려아직까지녯날의그것을면치못하고현대자본주의국제간의무역관계(무역관계(貿易關係))가극도로발달된 오날까지에 원시경제(원시경제(原始經濟))를 연구하는학자들의 연구재료가 되는것은휴미잇는 사실이지만은 대구의약렁시는 물품의집산과 교환의량식이 그와방불하여도 일홉부터 약시(약시(藥市))가아니고 약렁시(약령시(藥令市))란령(영(令))자에대하야우리는직각적으로 이시장의긔원은엇던권력(권력(權力))의 지배(지배(支配))맛해일게된것을 알수가잇다그러면 이약렁시가 처음시직된것은 언제부터인가 그야말로중학교교과서에까지『고래(고래(古來))로유명』이라고만씨여잇고 적확한년대를 쓰지안엇슴으로 대담하게 그년대를 내어노을수는업스나 비교적정확한수자를 조사한대로쓰면 서력일천륙백오십팔년(이조개국이백육십팔년효종조(李朝開國二百六十八年孝宗朝))거금이백칠십 사년전부터개시하게 되엿다고한다 그때야말로 조선을팔도(팔도(八道))에 닌후아노코 다시칠십일주로 난호아노흔 경상도의 정치적수부(수부(首府))도대구려니와 경상도(경상도(慶尚道))를둘너 남부조선각지는 산수명랑하고긔후온화하야각색약초(약초(藥草))의배양에지질이알맛기도하고 교통도편의하야(그때로보아서는)물산의집산에최적의지대도 대구엿스며 그때야말로임진병란(임진병란(壬辰兵亂) 이끗을막고모든볼회와 시설이 차자정돈뇌고발전을 보이며따라황실중심(성실중심(星室中心))으로끄으려는당시의위정사(위정자(爲政者))들은□□□□조금이라도 관계잇는 물품이면무엇이나물론하고 먼저진상(진상(進上))이란일흠아래최상의생산품을골너 서울도보내고 일반백성이먹고 입고쓰게되는 것이다그리고엇던 계□을물는하고병업시일생을 살수도업는것은 생리상자연의 리치엄으로 일국의지존(지존(至尊))인왕(왕(王))도병마의무서움은면치못 하는것이다 그래서황실에서일년동안쓸 약품을이곳에서 구하고저 국가의명령으로개시케한것이 오날날 우리가보고듯고 하는약령시의 처음이다그때는 약령이서면 감사(감사(監使))(현도지사(現道知事))가약재를골다봉하야중앙 정부 사약원(중앙정부사약원(中央政府司藥院))에 보낸후에 팔도에서모혀든 약재를일반 약국(약국(藥局))이사서완조선안의병든사락들이 그해그해의 치료를하게다엿다고한다(속(續))

약령시(藥令市)와경기(景氣)(이(二))

대구지국육(大邱支局肉) 사(瀉) 생(生)

【대구(大邱)】대구의약령시(약령시(藥令市))는다른상품시장에서는볼수업는특수한 유래를가지고 발달하여온만큼 지방의정청에서도일년춘추두차레에정긔적으로모여드는 지방생산자들을 위하야지방경제발달을 조장하고저 계획을세우고 제도의개선과 개시(개시(開市))긔간의 연장등 모든방면으로힘을써 보앗스나 모다뜻과갓지못하고 서구(서구(西歐))렬국의동양(동양(東洋))침입으로의학(의학(醫學))약학(약학(藥學))등학문이발달됨에침(침(針))은주사(주사(注射))로변하고바쇠는『메—쓰』로화하는바람에한약(한약(漢藥))의 가치는 전연그권위를일케되면서 대구의 약령시도차차워마하야 매매되는 약재료도주러지기만 하든중『후—버』겅긔가세계의주식시장(주식시장(株式市場))을혼란케하듯이 대구의 약령시장도 대타격의한때가 지나가게되엿스니 그는무엇일가?지금부터이십이년전(신해년(辛亥年))에중산손문 중산손우(中山孫又))씨혁명으로대청황실)대청황실(大清皇室))을넘어지면서부터는 청황실이 조선정부(조선정부(朝鮮政府))에의뢰하야사가든약품은실로막대한것이엿스나전부그매도의길이 막히게된 여러가지조건밋헤매매가 축소하여 전성시대의반도못되게 되얏다 그나마최근에는전주(전주(全州))대전(대전(大田))진주(진주(晋州))원산(원산(元山))등지에군소시장이개설되여이를약령시로밀미암아대구에떠러지는돈은매우감소되엿스나아직도령시가개설되면동성정입구(동성정입구(東城町入口))로부터남성정입구(남성정입구(南城町入口))까지 십여정(십여정(十餘町))에 처당재(당재(唐材))초재(초재(草材))등삼백여종의 약품도만흐려니와 그근처에림시려인숙(임시여인숙(臨時旅人宿))이무수히설치되고 포백기타 일용생활에필요한물품이면 평상시의 멧배나더잘팔리는 호경긔를 연설한다 그리하야 촌양빈들의낫서른돈을 먹어보겟다는 술집색시들까지 헐직한인조견으로 봄을싸고 도스리고안저서 열분애교를 술잔에담어보내는것도『넌센스』한징면인지는모르겟다마는 흡객술(흡객술(吸客術))이 졸열한다기보니 시대에뒤처진 기생들은본바닥에 거주하는손님들은『카페—』붉은녀급(여급(女給))들의자주(자(紫))빗유혹에다 뛰우고 음력과세를압서초조하는중 때맛침사재(시재(時哉))시재를불러 시내 각요리집 극장할것업시 대만원의성황을 이루는것은 그럴듯도한일이지마는 여긔에는 순진한산간에서 새노래물소리에 거치른세상일은 □도꾸지못한 산아이와도갓치 힘드려작만한 약재를도시구경겹 하여와와서판돈은『메리·픽포—드』안일망정어엽분녀자를맛나 잇는대로 다쓴후에명년의약령시 개설되기를 손을꼬바기다려서 와서보면 그녀자는어느하늘밋헤서 잇든남자와 단꿈을꾸는지 알길조차 바이업고작년구든맹서가 찬□(회(灰))처럼살어잘때화낌에 한잔무어라 먹자부어라 먹자하는연긔가튼 경긔는 견양경긔(견양경기(犬養景氣))이상으로 흥성거린나 그러기에여긔에최근오개년간의매매고외출동인원수와□적어본다

약령시(藥令市)와경기(景氣)

(삼(三))

대구지국(大邱支局) 육(肉) 사(瀉) 생(生)

약령시(藥令市)의현재(現在)

약령시의 밋치는바 경제관계는실로 다방면으로 황금왕시대를연줄하며 발달하여오는만큼 녯날에는 조선안에서 생산하는재료가 매매되는이외에 당재(당재(唐材))라고하야 증국으로부터금석지재(금석지재(金石之材))가만히수입되는외에는 벌로볼만한것이 업섯스나 교통의발날노 국제무역이빈번하야지게된 오날에는일본,중국,몽고등시는말할것도 업거니와동부『아푸리카』의찌는둣한열대지방에서 생산되는 소철(소철(蘇鐵))을비롯하야 황막한시베리아의천지를 내집가티 도라다니는웅담(웅담(熊膽))까지모혀들게되는것은이약정□를통해본□류문와사의 한로막이라고도 할수잇는것이다 이러케 약령시에모혀드는약재료가 교통의 혜택을임어거의 파멸에 갑가운약령시가새로히왕성하게되자 지금이야말로 시장의 량입구에 마천두(마천루(摩天樓))가튼『리—딍』(유도탑(誘導塔))을세우고『일미네—숀』(대전식(大電飾))사이에 흥긔청긔가나붓기며 지방으로부터 모혀드는 생산자들을끄려드리는것은 확실히 일반상업전술의발달을의미한다 그러나 원래이시장는 약을재료그대로가지고와서 매매케 되는것이 특질의엿스나 지금은천일령신환,조고약과어을빈만병수까지 시장목판에서 인긔를집중하고잇는것은 아모리보아도 조뵈 화지관는 사실이다 이가튼변천가운데도 특긔하야들것은 령시의개설의래 장구한년월을 지남에따라 그본래의 성질에배반하야 부업적상인게놉을 령시의주요구성 요소로하게되고 부터는 경상도내지방에밋치는 양령시의영향은 일반 소비경제상에크다란 파문을그리게되여 약텽시본래목적인 약새생산에 효과가적게되고 시장내의 불당중개인으로말미암아 일사 평판이조치못하엿슴으로 이러한 페풍을 일소하기위하야 지금부터이십여년선에 생긴 한약상조합한약상조합(漢藥商組合))과칠년전전주(전주(全州))에양령시가처음뇌려고할때에 대함키위하야생긴약령

흉회(약령시진흥회(藥令市振興會))가지금은약령시번영회(약령시번영회(藥令市繁榮會))로변경되여 최선의로력을 다하야오며 감독한결과 지금은어느정도까지 통제가되여간다고한다 그리하야 지금이야말로동력(동력(動力)의위력밋해거대한공장뉼이날로늘어남조선의『메드로포리쓰』를만드려는 대구현네과학(현대과학(現代科學))의태반(태반(胎盤))가튼대구의한복판에서 조선의 자랑이라고도할수잇는원시시장(원시시장(原始市塲))의한개가 벌서오늘날의 □제권내에발을듸듸고장차을래일의세계를향하야나가는것은홍미김흔일이다(속(續))

약령시(藥令市)의유래(由來)

(사(四))

대구지국육사생(大邱支局肉瀉生)

삼백년동안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복잡다단한 필연적 과정을경과하여오며 자본주의 경제의현계단에서의연히그존재가필요하게된대구약령시의발달사는완연히금일경제의발달사(발달사(發達史))라고보지안을수업다 그럼으로여긔특긔할것은 그성실상 순박함이짝이업는 죽말하면 매매하는시람들의아관박대(아관박대(雅冠博帶))라든지 생산품 포장가튼것까지도(물론변천된것도만흐나)삼백년전의 녯날을 그려볼만한순박한이서장에도현대금융자본의붉은혀(설(舌))는내밀기시작하엿다지금부터 시년전엇던 외래지본벌이자긔소유의따에시장의위치를옴기려고 현위치는 도시교통상불편하다는구실로써다방면으로술책을써보앗스나현장소에서긔십년간상권을 잡고잇는 대가들의명렬한반대로그만뜻을일우지못한일도잇다그러면내구약령시를 지배하고 따라전조선의한약상계에우이를삽고잇는 이는누구일가여긔는 누구보다도 김홍조(김홍조(金弘祖))씨를아침수가업다씨는 전선적으로보아 제이위가기를설허할만하다고하며그다음순서업시치면 신태문(신태문(申泰文))김종수(김종수(金宗洙))지이원(심의원(沈義元))리치욱(이치욱(李致旭))두병은(두병은(杜炳殷))김내명(김내명(金乃明))방규진(방규진(方圭鎭))제씨를칠수잇고 그중에도 두병은(두병은(杜炳殷))씨가튼이는여러대를나려오며 사업에 종사하야 그문패는 실로일백오십년 이란력사를가저 대구의 동인당(동인당(同人堂))이란 일홈이잇다

북평(北平)의동인당(同仁堂)은팔백년(八百年)의역사(歷史)가잇슴)그래서 대구의약텽시인긔는 이들의손에 좌우된다하여도과언이아니며 금년의약가는 금재금(김재금(金再禁))에따르는 제불가의폭등과 일중사변(일중사변(日中事變))의영향과중국은가(중국은가(中國銀價))의변동으로인하야소위당재(당재(唐材))는 폭동하엿고 조재(초재(草材))에잇서서 도변조로올은것이 불소하다는바 금후에드 더욱시세는오를무양이라고한다 여긔에당초재를물론하고 시세를 적어보앗스면좃켓스나 약명이한업시만코 날로변동이만흠으로 약렁시세표가 잇다는것만말한후에 특수한고저를보이는 몃가지를 적어보면 당재의원상산약(원상산약(元常山藥))은작년에는 매근에일원륙십전하든것이 금년은 단오십전에폭락되여 이십년레에 처음보는헐가라하며 산수유(산수유(山茱萸))는작년에 매근사십전하든것이 금년은십전에폭락되고 토사자(토사자(兎絲子))가튼것도 작년사오십전에매매되든것이 금년은십전에 폭락되여 자방생산자의 저울(형(衡))에 예긔치못한 광란(광란(狂亂))을보이고잇다고한다

약령시(藥令市)의장래(將來)

그러면 다음날의약텅시는 엇더케될것인가?이문제는 결코예언자의 심심푸리와가튼 헛된소리는아니다적어도현세계의경제관계 와그에따라 일어나는모든사정이 쇄신된다면 모르지마는현계단의 경제제도가 그량존속되는한에는 세계적으로 한약에대한연구가왕성하여지고한약의권위가나날이놉하가는만큼약텅시의장래는압흐도세계에그일홈이놉하진다고일부인사들이말하고잇는것이그다지허언이아닐는지도 모른다 그래서지금은시장의형세가 산만하게생산자가 중개인울거처 도매상에게 팔게되여중간에책취를 당하게된다 하여도 장래는 현시장의대자벌들이주식(주식(株式))이나 혹은학자(합자(合資))의형식으로시장을상설하고도매와 개인생산자사이에 직접취인하게되여 지방경제의 윤택과약초생산의 장려의 약텅시본래의목적을 소개하려는것이 당업자간의 의도(의도(意圖))인 동시에매우현명한 의견인듯하다 그래서참된 대구자랑을 만들고조선의자랑을만들자——(완(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