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암진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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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주하 (토론 | 기여)님의 2025년 12월 2일 (화) 16:27 판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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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정암진 전투

개요

정암진 전투는 임진왜란 초기, 곽재우가 이끄는 의병 약 50명이 일본군 6군(제6번대)의 선봉대 약 2,000명을 정암진 일대에서 매복 기습하여 전라도 진출을 저지한 전투이다. 규모 면에서는 소수 대 다수의 전형적인 비정규전(successful irregular warfare) 사례로, 일본군의 전략을 근본적으로 흔들어 놓았다는 점에서 임진왜란 초기 의병활동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승전으로 평가된다.

전투 전야

임진왜란 발발 이후 조선은 일본군에게 당시 주요 곡창지대인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일명 하삼도) 중 전라도를 제외한 지역을 모두 빼앗긴 상황이었다. 그리하여 전라도는 조선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했던 곳이었고 이에 일본군은 전라도를 점령키 위하여 6군을 의령으로 이동시킨다. 그러자 앞서 의령 지역에서 의병을 일으킨 곽재우는 6군을 공격하기 위해 남강 정암진 부근의 갈대밭에 의병 50여 명을 매복시켰다.

전투

음력 5월 24일 왜장 안코쿠지 에케이(安國寺 惠瓊)[1]는 2000여 명의 선봉대를 정암진 인근으로 보내어 도하 지점을 골라 푯말을 세워두게 하였다. 그러나 이날 밤 곽재우의 의병들은 일본군이 세워놓은 푯말의 위치를 늪지대로 옮겨 세워두도록 하였고 이를 몰랐던 안코쿠지의 주력군은 푯말을 따라 진격하였으나 결국 늪지대에 빠지게 되어 미리 매복하던 곽재우의 의병에게[2] 일제히 기습을 받아 크게 패배하고 말았다.

결과 및 영향

결과는 그야말로 대승. 곽재우군은 불과 50여 명에 불과한 의병으로 2,000명이 넘는 일본군 선봉을 패주시켰으며, 일본군 6군은 전라도 진출을 포기했다. 이 전투 이후 곽재우의 의병은 불과 50여 명에서 오운과 박사제의 병력 등이 합세하여 3,000명이 넘는 군세를 갖추게 되었다.

여담

현재 정암진에는 의령군에서 조성한 의령관문공원이 있다. 의령대로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정암진의 암벽 중간을 파괴하고 그 자리에 의령관문을 지었던 것에서 더 나아간 것이다. 더불어 남강을 가로지르는 의령대로 다리 아래로는 지금까지도 이 구간의 얕은 수심을 나타내는 하중 사구를 볼 수 있으며, 공원 옆으로는 지명의 유래가 된 정암(鼎巖)이라는 이름의 바위가 강변에 남아 있다.

그러나 문제는 이로 인해 정암진의 천연 장벽 역할을 했던 암벽이 모조리 파괴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비단 관문공원만이 아니라 남강로 건설을 위한 불가결한 선택이었을 터이며, 역사 기록에 따르면 실제 전투가 있었던 곳은 이 암벽이 아니라 암벽 건너편의 갈대밭이므로 정암진에 얽힌 전사(戰史)와 암벽의 보존 여부 사이의 관계성은 거의 없다는 결론이 내려진 것일 수 있다.

정암진 전투를 지휘한 곽재우의 첩장인 이로는 임진왜란 직전 친구 류성룡에게 보낸 서신에서 조정의 전쟁준비를 비판하며 "삼가 고을은 정암진이 앞을 막고 있으니 왜적이 날아서 건너겠는가."라고 자신한 바 있었다. 이 문구는 당시 전쟁을 앞두고 조선 유림들의 안일한 인식을 까는 용도로 자주 인용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사위에 의해 정말로 왜적은 정암진을 넘지 못했고, 전라도 진출의 통로인 남강 연안을 확보하는데도 실패했다.[3]

대중매체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서 나온다. 안코쿠지 에케이[5]와 코바야카와 타카카게가 전라도로 진격하자 매복해 있다 공격해 압승을 거둔다. [6]

천강 홍의 장군 곽재우. 전란이 터진후 단 열흘만에 의령땅에서 거병한 최초의 의병장이다. 그는 전투때마다 붉은 옷을 입고 분전하였으므로 세인들은 그를 홍의 장군이라 불렀다. 정암진에서 벌어진 이 전투에서 곽재우는 화려한 기만술을 펼쳤으니 그는 부하들에게 똑같은 옷을 입혀 독전케한 것이 그것이였다. 이는 아군의 수가 적군의 수에 비해 현저히 많게 보여 적을 심리적으로 위축시키기 위함이였던 것으로 보인다. 정암진전투에서 곽재우가 이끄는 의병들은 일본의 정예 정규군을 맞아 압승을 거두니 우리 민족의 저력을 확인하는 순간이라 아니할 수 없다. 또한 히데요시의 전라도 공략전의 그 예기를 꺾은 전투였으니 그 의의는 실로 크다 하겠다.

북한에서 만든 기록 영화가 있다. 수준이 낮은 것은 물론이고[7] 고증오류가 심각한 수준이다. 의병의 수가 너무 많아 보이는 것도 이상하다. 이 전투는 위에서 언급했듯 소수의 의병이 다수의 일본군을 대파한 전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