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창호(安昌浩)
안창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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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한자)표기 | Ahn Changho(安昌浩) | |
호 | 도산(島山) | |
출생 | 1878년 | |
사망 | 1938년 | |
묘소 | 서울특별시 강남구 신사동 도산공원 | |
관련링크 | https://www.yka.or.kr/html/about_dosan/life_achievement.asp |
목차
개요
흥사단 100주년을 맞이하여 KBS가 제작한 안창호 다큐멘터리이다. 안창호에 대해서 더욱 상세히 알 수 있다.
안창호는 독립운동가, 교육자, 사상가로서, 특히 교육 운동 분야에서 한국 근대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안창호는 교육 운동을 중심으로 민족 자강과 독립 정신 함양을 목표로 하여 근대 교육의 발전을 도모하며 다양한 독립 운동 활동을 펼쳤다.
약력
- 구세학당(경신학교) 졸업 (1885년)
- 독립협회 회원 (1897년)
- 강서 점진학교 설립 (1898년)
- 공립협회 설립(1905년)
- 신민회(新民會) 설립(1907년)
- 평양 대성학교 설립 (1908년)
- 대한인국민회 3대 총회장
- 흥사단 설립 (1913년)
- 대한민국 임시정부 내무부장
- 대한민국 임시정부 법무부장
- 대한민국 임시정부 노동총장
-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총리대리
-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령
- 국민대표회의 준비위원회 위원
- 국민대표회의 부의장
- 난징 동명학원 설립 (1924년)
- 한국독립당 창당 (1930년)
생애
출생과 성장
안창호는 1878년 11월 9일 평안남도 강서군 초리면에서 태어났다. 16세 때 평양에서 청일전쟁을 접하고 일본과 청나라가 마음대로 조선 땅에서 싸우는 것은 조선에 힘이 없는 까닭이라고 생각하여 민족 자강에 대한 열정을 가지게 되었다. 9세 때에는 독립협회에 가입하여 평양에 독립협회 관서지부를 결성하였다. 안창호는 1092년 미국으로 유학을 가서도, 그곳 교민들의 어려운 생활을 보고 학업도 중단하고 교민을 지도하였다. 이러한 활동으로 교민사회에서 대중적 지도자로 성장해 공립협회의 초대 회장이 되었다.
신민회 결성
안창호가 미국 유학길에 올라 있던 중 국내 정세는 더욱 악회되었고, 1907년 국내에서의 독립운동 전개를 위해 1907년 초 귀국하였다. 안창호는 민주공화국가건설(民主共和國家建設)를 민족운동의 목표로 삼고 이를 위한 방법론으로서 독립전쟁준비론(獨立戰爭準備論)과 비밀결사인 신민회(新民會)의 조직을 고안하였다. 안창호는 귀국 이후 양기탁(梁起鐸), 전덕기, 이동휘, 이강, 이갑 등 국내 계몽운동의 핵심인물들을 찾아 비밀결사를 조직하는 일에 착수하여 신민회(新民會)를 조직했다. 안창호는 신민회를 중심으로 전국 각지의 독립운동가들을 규합해 가는 한편, 교육ㆍ언론ㆍ산업 등 여러 부문에 걸쳐 다양한 사업들을 벌이게 하였다. 1911년 105인 사건으로 일제에 의해 강제로 해산당할 때까지, 약 3년간의 신민회 활동은 독립운동에 커다란 원동력이 되었다.
대한인국민회와 흥사단 활동
1910년 5월, 안창호는 미국 본토와 하와이의 한인 단체를 통합하여 대한인국민회를 결성하는 데 참여했다. 대한인국민회는 북미와 하와이를 비롯하여 시베리아와 만주에도 지방총회를 설립하며 점차 확장되었다. 1912년 11월,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가 조직되었고, 안창호는 초대 중앙총회장으로 선출되었다. 이를 통해 해외 교민 사회는 하나의 조직으로 통합되었고, 안창호는 이를 기반으로 현실적인 독립운동의 중심을 해외로 옮기려 했다.
그는 해외 한인의 단결이 독립운동의 토대가 될 것이라 믿고, 1913년에는 흥사단을 설립하였다. 흥사단은 민족운동의 간부를 양성하기 위한 훈련단체로, 안창호가 국내에서 조직했던 청년학우회의 정신을 계승한 조직이었다. 흥사단은 미국을 중심으로 활동했으며, 이후 3·1운동을 계기로 중국과 국내에서도 회원을 확보하며 활동 범위를 넓혀 갔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활동
1919년 5월 상하이에 도착한 안창호는 이미 조직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내무총장으로 선임되었다. 안창호는 당초 정당 형식의 독립당 결성을 주장했으나, 임시정부 수립이 기정사실화되면서 임정 각료로 활동하게 되었다. 그는 임시정부의 실체를 강화하기 위해 전력을 다하며 국민회 자금을 이용해 정부 청사를 마련하고 독립신문 발간과 독립운동 방략 작성을 주도했다. 또한 연해주의 대한국민의회, 서울의 한성정부와의 통합 작업을 이끌어 1919년 9월에 통합 임정을 수립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통합 임정 내에서는 이승만과 이동휘 간의 갈등이 심화되었고, 안창호는 이를 조정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결국 그는 임정을 떠나 국민대표회의를 소집하여 독립운동의 재조직화를 시도했으나, 내부 분열로 인해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사망
안창호는 끊임없는 독립운동과 민족교육에 헌신하던 중, 1932년 상하이에서 체포되어 일제의 감시와 구금 생활을 이어갔다. 이후 병세가 악화되어 1938년 3월 10일, 경성부(서울)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그의 죽음은 당시 독립운동 진영에 큰 충격을 주었으며, 그의 유산은 교육, 독립운동, 그리고 민족의식 고취라는 면에서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교육관과 활동
교육 철학
안창호는 교육을 통해 민족의 자강과 독립을 이루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었다. 그는 실용주의 교육 철학을 바탕으로, 학생들에게 실질적인 지식과 기술을 제공하는 것과 동시에 도덕적 품성과 민족의식을 함양하는 것을 중요시했다. 그의 교육 철학은 "나라를 구하려면 사람을 길러야 한다"는 신념에 뿌리를 두고 있다.
대성학교 설립
대성학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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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표기 | 大成學校 | |
설립일 | 1908년 9월 | |
설립자 | 안창호(安昌浩), 윤치호 | |
설립위치 | 평양 | |
계승 | 대성고등학교(강원), 대성고등학교(서울) [1] | |
관련링크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14519 |
안창호의 대표적인 교육 구국 활동 중 하나는 대성학교 설립이다. 안창호는 1907년 평양에 대성학교를 설립하였다. 이 학교는 단순한 학문 교육을 넘어, 민족의식을 심어주고 독립운동의 지도자를 양성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학생들에게는 실용적 학문과 애국심을 동시에 가르치며, 이 학교는 일제강점기 민족교육의 중심지로 자리 잡았다.
대성 학교의 교육 방침은 '인재 양성을 통한 교육 구국'의 이념 아래, 건전한 인격의 함양, 애국정신이 투철한 민족운동가 양성, 실력을 구비한 인재의 양성, 건강한 체력의 훈련에 두었다. 개교 때의 입학생은 90여 명이었으며, 추후에는 민족사학으로서 크게 환영을 받아 입학 지원자가 500~600여 명이 되는 때도 있었다. 그러나 105인 사건이 발생하고 신민회가 해산되며 창립자인 안창호도 망명하게 되었고, 대성학교도 19명의 졸업생을 남긴 채 조선총독부 학무국에 의해 폐교된다.
흥사단 활동
흥사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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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표기 | 興士團 | |
설립일 | 1907년, 1913년 | |
설립자 | 유길준, 안창호 | |
위치 | 서울특별시 종로구 대학로 122 | |
관련링크 | https://www.yka.or.kr/html/main/index.asp |
1913년, 안창호는 미국에서 1907년 유길준이 설립한 흥사단(興士團)을 재창립하였다. 흥사단은 "무실역행(務實力行)"과 "충의용감(忠義勇敢)"을 강령으로 하여 청년 지도자 양성과 민족운동의 조직화를 목표로 삼았다. 흥사단의 활동은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독립운동의 지속적인 동력을 제공하는 데 기여했다. 흥사단은 독립 운동가들을 탄압한 일본 제국과 군부 정권 시기를 모두 이겨내며 100년이 넘도록 존속하고 있어, 현재까지도 한국 근현대사에 주요한 발자취를 남기고 있다.
참고문헌
- 「도산 안창호의 생애와 업적」, 『흥사단』, https://yka.or.kr/html/about_dosan/life_achievement.asp?utm_source=chatgpt.com, 접속일 : 2024년 12월 20일
- 「안창호」, 『우리역사넷』,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18255, 접속일 : 2024년 12월 20일
- 「대성학교」, 『우리역사넷』, http://contents.history.go.kr/mfront/ti/view.do?treeId=str_040&levelId=ti_025_0240, 접속일 : 2024년 12월 20일
「대성학교」, 『한국민족문화대박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14519, 접속일 : 2024년 12월 20일
각주
- ↑ 두 고등학교 모두 광복 이후 개교하여 직접적으로 계승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두 학교 모두 대성학교의 정신을 이어받은 개교 이념을 가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