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혁명간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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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tnyeom (토론 | 기여)님의 2024년 12월 22일 (일) 01:15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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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조선혁명간부학교(朝鮮革命幹部學校)는 1932년 의열단(義烈團) 단장 김원봉(金元鳳)이 중국의 장제스(蔣介石)의 지원으로 독립운동 군사 간부를 양성하기 위해 중국의 난징(南京)에 설립한 군사간부양성학교이다. 1932년 개교 이래 1935년 9월 폐교까지 1기생 26명, 2기생 55명, 3기생 44명 등 총 125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설립

1932년 단장 김원봉에 의해 중국의 난징에 설립되어, 당해 10월부터 1935년 9월에 이르는 3년여 동안 청년 투사를 양성했다.

주요 인물과 활동

인물 역할 및 기여
김원봉 단장, 조선혁명간부학교 설립
신악 조선혁명간부학교 교육 주임, 군사 훈련 담당, 의열단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으며 추후 조선의용대 부대장, 한국광복군 중교 등을 역임
김세광 조선혁명간부학교 교관, 1933년 9월∼1934년 4월에 조선혁명간부학교 제2기 과정 교육을 담당하였으며 조선민족혁명당 중앙군사학 편찬위원으로 군사학 편찬에 종사
왕통 조선혁명간부학교 입학, 졸업 후 조선의용대 정치지도원, 조선민족혁명당 중앙위원, 대한민국임시의정원 의원, 한국광복군 지대장으로 활동

배경

독립운동이 실질적인 항일 투쟁의 형태로 진행되기 위해서 한인 청년들이 군벌 산하의 군사학교에서 교육을 받을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하고자 노력했다. [1] 하지만, 명확한 결과가 나오지 못했다. 임시정부가 군사 간부를 양성하기 위해 상하이에 세웠던 육군무관학교는 6개월간의 초급장교 양성과정에서 1920년 상반기 19명, 하반기 24명 배출을 끝으로 안타깝게 폐교했고, 임시정부 군무총장 노백린은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비행사양성소를 설립했으나 이 역시 비행대 편성으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이렇게 무장 투쟁을 위한 시도가 무산되자, 1919년 조직된 무장독립운동단체인 의열단은 중국국민당과의 합작을 통해 돌파구를 마련하고자했다. 또한, 단원 상당수가 국민당과 함께 북벌에 참가했기 때문에 국민당 입장에서도 김원봉과 의열단을 지원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했다.

특징

조선혁명간부학교가 운영되는 3년 동안, 중국 국민당은 매월 경상비 2,000~3,000원, 수시 필요경비 1,000~1만 원, 기타 운영비 400~1,000원 등 각종 운영자금 전액과 화기·탄약·피복 등을 지원했다. 학생들은 군사학뿐 아니라 별도 신설된 정치학, 자연과학을 포함해 경제학·사회학·철학·혁명학·물리학·화학·지리학까지 다양한 학문을 공부할 수 있었다.

의의

조선혁명간부학교는 일제의 침략에 대응하기 위하여 의열단과 중국 정부 사이에 형성된 한중연합의 결실이었다. 의열단은 중국 정부와 연대를 항일투쟁의 침체국면을 탈피할 수 있는 계기로 인식하였다. 따라서 의열단의 간부학교 운영은 국제적 연대 측면과 의열단 활동의 활성화라는 양면성을 가졌다.


조선혁명간부학교의 교장인 김원봉은 개교사에서 간부학교의 설립 취지가 의열단의 항일 투쟁 정신을 계승하는 데 있음을 전제하고, 교육 목적은 군사학과 무기 사용법 등 군사 지식을 익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조선혁명간부학교의 교육 목표는 일본과의 총결전에서 투쟁의 주체가 될 조직을 구축하기 위한 선행 단계로서, 대중역량의 조직화와 체계화를 선도할 중견 간부를 양성하는 것이었다. 즉, 국지적·부분적 단계의 항일 투쟁 국면을 대중 투쟁의 단계로 발전시키는 방안이었음을 알 수 있다.


졸업생들의 활동

간부학교 졸업생들은 민족혁명당의 항일투쟁체계로 편입되어 항일 투쟁을 이어나갔다. 일부는 조선의용대의 핵심 세력으로 성장하였고, 다른 일부는 한국광복군의 주요 무장 인력이 되기도 했다. 또한, 조선의용대의 일원으로서 화북 지역으로 이동하여 화북조선동맹과 조선의용군에 가담하였다.

참고 자료

각주

  1. 신규식이나 여운형은 중국의 우페이푸(吳佩孚) 등이 지휘하는 군벌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 우페이푸는 친한파 군벌 중 하나로서, 중국군이 한국을 거쳐 일본에 진공해야 함을 주장했는데, 이러한 측면에서 여운형 등이 활동했던 한국노병회와 뜻이 맞아 교섭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