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익李容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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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미온느 (토론 | 기여)님의 2024년 12월 20일 (금) 06:05 판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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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약력

[이용익 약력[1]]
일자 직무
1882년 감역(監役)
1883년 단천부사(端川府使)
1885년 북청부사(北靑府使)
1887년 영흥부사(永興府使), 함경남도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1894년 함경도 광무(鑛務) 관리[2], 함경남도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1896년 여러 지역의 광산을 관리하는 임무를 맡음, 평안북도관찰사(觀察使)
1897년 중추원(中樞院) 의관(議官), 탁지부(度支部) 전환국장, 유배
1899년 내장원경(內藏院卿)

생애

1. 출생
1854년 1월 6일, 함경북도 명천(鳴川)에서 아버지 이병효(李秉斅)의 아들로 출생하였다.

2. 성장

  • 5~15세까지 서당에서 한학(漢學)을 수학하였다.
  • 20대초까지 주자학자 초병덕(楚秉悳)의 지도로 학문을 배웠다.
  • 21세에 학문을 그만두고 고향을 떠났다.
  • 이후 정계에 진출 전까지 보부상(褓負商)이나 물장수로 일하며 돈을 모으고, 함경남도 단천에서 금광에 투자하여 큰 돈을 벌었다는 추측이 가장 지배적이다.


3. 정계 진출

  • 첫 임명: 1882년 임오군란(壬午軍亂) 때, 명성황후를 장호원으로 피신시키고 명성황후와 민영익 사이에서 연락책의 역할을 한다. 이러한 공을 인정 받아 감역(監役)으로 임명된다.
  • 고종의 신뢰: 정계 진출 후 금 채굴과 고종의 화폐제도 의견 지지를 바탕으로 고종의 신뢰를 얻는다.
  • 위기: 1888년 민란을 이유로 함경도병마절도사(咸鏡道兵馬節度使)에서 탄핵당한 후, 유배를 간다. 이후 1890년에 재복귀하지만 1896년 민란이 다시 발생하여 또다시 유배를 간다.
  • 광산경영: 그의 광산 경영 능력이 인정받아, 여러 자리를 거쳐 전국 광산을 관리하기에까지 이른다.

평가

각주

  1. 보부상 출신에서 대한제국의 실세로, 우리역사넷, http://contents.history.go.kr/mobile/kc/view.do?levelId=kc_n403900&code=kc_age_40, 접속일: 2024. 12. 20. 해당 페이지의 내용을 정리하였다.
  2.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의 임명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