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재학당
소개
배재학당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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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표기 | 培材學堂 | |
설립일 | 1885년 | |
설립자 | 아펜젤러(Appenzeller,H.G.) | |
설립위치 | 서울특별시 중구 서소문로11길 19 | |
계승 | 배재대학교, 배재고등학교, 배재중학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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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5년 선교사 아펜젤러가 세운 한국 최초의 근대식 사립학교로 중등과정을 담당했다. 1886년이 고종이 배재학당이라는 이름을 사하였고 미국인들의 후원을 받아 1887년에 제대로 된 건물을 세웠다. 영어교육을 중점적으로 행했으며 학생자조정책을 채택하여 가난한 학생들이 학교에서 일을 하며 수업료를 벌 수 있도록 하였다. 현재 기존의 건물은 2008년부터 배재학당역사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배재중학교, 배재고등학교, 배재대학교가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사회운동
협성회
1896년 13명의 배재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대중계몽을 목적으로 조직한 단체로, 이후 일반인의 입회를 허용하며 1898년에는 300여명의 회원을 두었다. 독립협회와 『독립신문의 계몽사상 그리고 입헌군주제의 실천을 구현하기 위한 사회운동단체로 변모하였다. 협성회는 토론회라고도 불렸으며 자주독립, 자주관계, 민족개혁등의 내용을 논하였고 토론을 보기 위해 많은 청중들이 몰렸다고 한다. 토론의 내용을 홍보하기 위해 1898년부터 협성회회보를 발간하기 시작하였는데, 이는 우리나라 최초의 일간신문인 <매일신문>이 되었다.
출신인물
주시경
1894년에 배재학당에 입학하였고 학교에 다니는 동안 <독립신문>의 국원이자 협성회회보의 편집자로 일했다. 배재협성회, 독립협회에서도 임원으로 활동하였고 1896년 문법체계통일을 위해 최초의 국문법연구단체인 국문동식회를 조직하여 연구하였다. 졸업 후 그는 애국계몽운동에 헌신하며 1906년부터 1910년까지 서울시내의 18개 중학교에서 주 평균 40여 시간씩 국어강의를 실시했고 하기방학에는 무료로 국어강습소를 열어 청소년들을 교육하였다. 이후 여러 학술적 축적을 거쳐 <국어문법>을 저술하였다. 주시경의 마지막 저술인 <말의소리>는 국어음운학의 과학적 기초를 확립하였으며 구조언어학적 이론을 구체적으로 창안한 세계 최초의 업적으로 높이 평가된다. 1910년 보성중학교에서 일요일마다 조선어강습원을 열고 교육에 힘썼으며, 과로로 인해 몸이 약해져 1914년 사망했다.
지청천
1904년 배재학당을 졸업 후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 일본 동경의 육군유년학교,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였다. 1차세계대전에서 일본군으로 복무하였으나 3.1운동이 일어나자 탈주하여 만주로 건너가 신흥무관학교의 교관으로 일했다. 이후 독립군단을 조직하여 부사령관으로 임했으며 한국독립당을 창당하고 한국독립군을 조직하여 총사령에 취임했고 한·중연합군을 조직하여 무장항일 투쟁을 계속하였다. 1940년 임시정부의 한국광복군 총사령관으로 투쟁하였다.
여운형
1900년 배재학당에 입학하였으나 중도에 그만두었다. 1919년 재일유학생의 2·8독립선언과 3·1운동에 관여하고, 김규식을 상하이로 초빙하여 파리강화회의 한국대표로 결정하였다. 1919년 상해임시정부의 수립에 힘썼으며 임시정부의 임시의정원 의원과 외무부 차장으로 활동하였다. 상하이에서 아동들에게 독립사상과 애국정신을 교육시키기 위해 인성학교를 설립했다. 1944년 광복 후의 일을 위한 조선건국동맹을 조직하여 활동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