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의 독립운동 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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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토마토 (토론 | 기여)님의 2024년 6월 22일 (토) 20:38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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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정부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모습이다.

개요

일제 강점기 초 러시아는 만주와 더불어 한국의 독립운동 중심지였다. 조선인들이 창당한 고려공산당으로 인해 소련과의 관계가 형성되었다. 또한 연해주를 중심으로는 만주보다 더 원활한 독립운동이 이루어질 수 있었는데, 대표적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이전의 대한국민의회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수립되었다. 소련 자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한국 독립운동 단체 및 군대에 대한 태도가 많이 바뀌는 양상을 보이기 때문에 중국과 같은 전폭적인 지원이 이루어졌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그래도 한국의 독립운동을 지원하였던 이력이 있는 것은 분명하다.

러시아의 독립운동 지원 배경

조선 내 사회주의 세력과 소력 공산당 간의 연결

3.1운동 이후 조선에는 사회주의 사상이 유입되었는데, 이에 따라 러시아 이르쿠츠크와 중국 상해에서 각각 조선인들이 세운 고려공산당이 창당하였다. 이에 따라 조선 내의 사회주의 세력과 소련의 공산당 세력 간 연결관계가 생기게 된다. 이는 독특하게도, 조선이 소련에서 직접 사회주의를 도입하였기 때문이다.[1] 소련 공산당은 '일국일당' 즉 하나의 국가 당 하나의 공산당만을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위해서 조선 내부의 주요 사회주의 세력들이 노선 투쟁을 벌일 수밖에 없었다. 소련 공산당은 조선의 공산당 일국일당을 위해 이러한 단체들의 갈등을 없애고자 했다.

러시아 내전

러시아 혁명 이후 혼란한 국면에 빠진 러시아는 결국 러시아 내전(일명 적백내전)이 발발하고 만다. 와중 당시 일본 총리였던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혼란한 틈을 타 러시아로 출정을 강행하는데, 이를 타파하기 위해 소련은 한국 독립세력을 지원해 내전에서 기세를 잡고자 했다.

지원 양상

사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기본적으로 우파적 성향을 보이는 단체였기 때문에, 러시아는 임시정부와 가장 관련이 적은 나라 중 하나이다. 러시아가 임시정부에 관심을 가졌던 것은 굉장히 초기 단계, 한인사회당의 이동휘가 국무총리로 참여하였던 1919년 11월부터 1921년 1월까지 15개월의 짧은 기간에 불과하다. 상해 임시정부 초기에 대소외교를 주도했던 한인사회당 세력은 상해 임시정부 구성원들이 소련 정부와 볼쉐비키 세력에 대하여 우호적인 성향을 갖고 있다는 점을 강조했고 이에 따라 소련 정부는 임시정부블 매우 적극적인 제휴상대로 여기게 되었다.

임시정부와 소련 정부 간 외교 관계

기존에 러시아에 우호적이었던 것은 한인사회당으로, 러시아 혁명과 무장부대 활동에 찬성한 인사들 중심으로 결성된 단체이다. 이들은 러시아 내전 당시 일본 등 연합국의 후원을 받는 백군과 맞서 싸우는 것이 곧 한민족 독립의 길이라 여겨 군사부인 한인적위대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는데, 이에 따라 소련 측과 우호 관계를 형성하게 된다.

이후 1919년 상해에 임시정부가 수립되고 11월에 한인사회당의 이동휘가 초대 총리로 취임하면서, 자연스럽게 소련 정부는 임시정부와 우호적 관계를 취하게 된다. 이동휘는 무장투쟁을 통한 독립쟁취를 주요 노선으로 채택했는데, 이에 대해 소련이 긍정적 입장을 취하였기 때문에 임시정부는 소련 정부를 상대로 협력 외교를 통한 대일 공동노선을 구축할 수 있었다. 소련 정부 입장에서는 약소민족의 해방운동이 자신들의 혁명이념을 확산하면서도 간섭국 일본 제국주의를 극동지역에서 물리치는 데 유효한 전력임을 파악하고 관심을 표명하며 협력을 추진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1921년 두 정부 간 비밀 협정이 맺어져, 소련 정부가 임시정부를 승인하고 한국독립군의 무장 및 군수 지원, 심지어는 독립자금까지 지원하게 되는 것으로 이어졌다.[2]

다만 해당 자금은 임시정부까지 도달하지 못했다. 지원받은 자금을 운송하던 중 극동지역에서 한인공산당 이르쿠츠크파에게 강탈당하였고, 이 사건으로 인해 이동휘의 위신이 떨어져 임시정부 관계자들의 공산주의 그룹 이탈이 급속도로 진행되었다.

한러 비밀군사협정

1920년 7월 당시 임시정부와 소련 정부는 상호 승인하고 군사원조하며 대일항쟁을 공동으로 추진하기로 합의하며 협정을 맺었다. 공식 문서가 밝혀진 바 없어 구체적 내용에 대해서는 사실관계 확인이 필요하다. 공식 문서 외에 확인된 것은 한형권 특사가 러시아 측에 제출한 편지와 그 내용을 확인한 회고 내용, 일본 측에서 발표된 언론 보도 정도이다. 한형권의 회고에 따르면 임시정부의 요구사항은 1) 대한민국임시정부 승인, 2) 한국독립군의 무기 및 장비를 적군과 동일하게 지원, 3) 시베리아에 한국사관학교 설립하여 독립군 지휘할 사관 양성, 4) 혁명운동 자금지원 등으로 생각된다. 합의 내용에 대한 실행 여부는 군수물자 및 장비 지원, 사관학교 개설 등이 확인되었다.

영향

소련 정부의 자금 지원이 있었으나 이것이 임시정부까지 도달하지 못하고 중간에 강탈되어버린 상기 사건으로 인해 이동휘는 임시정부 내에서 신임을 잃었고, 이에 따라 임시정부 내에서 한인사회당 세력을 비롯한 좌익 인사들이 분리되었다. 이후 임시정부는 우익적 성향을 보이는 단체로 선회하고, 자연스럽게 소련 정부의 관심 역시 거두어지게 되었다. 당시 지원되었던 독립자금은 분리된 좌익 단체들이 공산주의 운동에 사용하기로 최종 결정하였고, 해당 공산주의 그룹이 고려공산당으로 개칭되었다,

비밀 군사협정과 관련해서도 그 끝이 좋지는 못했다. 해당 협정을 잘 보면 만주에서 활약하던 한국 독립군이 1921년 러시아령 자유시로 넘어가 군사지원을 받고 군력을 유지하되 소련 적군 25군사령부의 지휘를 수용해야 했던, 그 과정에서 ‘자유시참변’으로 이어진 일련의 한국 독립군 부대 이동 및 통합과정이 연상된다. 실제로 소련 정부는 한인 독립군부대들에게 국경을 넘거나 통합과정에서 무장해제하도록 했고, 러시아군의 지휘를 받도록 했다. 사실상 비밀 군사협정이 맺어지고 이에 따라야 했다면 독립군들의 운명은 이미 정해져 있었던 것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종합하여 보면, 임시정부와 소련 정부는 국제정세의 변화에 따라 외교적 입장을 달리한 것으로 보인다. 그 과정에서 러시아 공산당이 한국사회주의 운동 내지 단체의 정치노선과 연합하면서 복잡한 상황을 연출한 셈이다. 결국 양국의 초기 외교관계는 식민지시대 일제를 대하는 국제관계에 처절히 좌우된 것이다. 소련은 일본의 침략을 막기 위해 비공식적으로 한국 독립군의 지원을 필요로 했으나, 해당 상황을 넘기자 독립군을 제대로 대하지 않았으며 결국은 자유시 참변의 무장 충돌을 빚었다.

관련 영상

참고문헌

<<내용 전반에 대해 심헌용. (2021).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소비에트러시아 외교관계의 형성과 독립외교 전개 그리고 ‘비밀군사협정’ . 재외한인연구, 54, 1-29. https://www-earticle-net-ssl.oca.korea.ac.kr/Article/A397878 참조.>> <<추가적으로 반병률. (2010). 러시아(소련)의 대한민국임시정부 인식. 역사문화연구, (), 489-524. https://scholar.kyobobook.co.kr/article/detail/4040054828623 참조 >> <<한국 내 공산주의 단체에 대한 내용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조 >>

분류

  1. 베트남과 중국은 프랑스에서 사회주의를 들여왔다.
  2. 지원된 독립자금은 총 40만 루블로, 이는 상해 임시정부에 지원되었던 자금 중 가장 큰 규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