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
목차
중일전쟁
요약
1937년 7월 일본이 침략해 중국에서 전개된 전쟁을 말한다.
배경
일본의 당시 외교 상황
일본은 1930년대 중반 이후부터 동아시아 지역에 대한 지배력을 구축하려 하였다. [1] 일본의 국방 계획은 중국 대륙을 이용해 국가를 방어하고자 하였다. 또, 서태평양에 대한 제해권을 확보해 미국의 위협에 대비하고, 동남아시아 지역으로 경제적 확장을 꾀하고자 하였다. '국방국책대강'에서 "황국의 국책은 우선 동아의 보호 지도자로서 지위를 확립하는 것에 있다'라고 이야기 한 것에서 이를 잘 확인할 수 있다.
이에 더해 일본은 소련에 대해 경계하는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소련의 침략을 경계하기 위해 북중국 지역을 확보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1936년 8월 11일 채택됭 '대 중국 실행책'에서 이를 잘 확인할 수 있는데, “북중국 지역 처리의 주안은, 해당 지역을 방공, 친일, 친 만주국을 위한 특수 지대로 삼고, 아울러 국방 자원의 획득 및 교통 시설의 확충에 기여하게 해서, 우선 소련의 침공에 대비하고, 다음으로는 일본-만주국-중국 3국 제휴 공조를 실현하는 기초로 삼는 것에 있다”라고 되어 있다.
만주전쟁과 중일전쟁의 발발
일본은 1931년 9월 18일 만주전쟁을 일으키고 중국의 동북지방을 점령했다. 점령한 지역을 '만주국'이라고 하며 식민지로 만들었다. 앞서 언급했던 중국 점령의 계획을 실현하려 했던 일본은 1937년 7월 7일 베이징 주변의 돌다리 '루거우차오'에서 일본군과 중국군 사이 있었던 사건을 계기로 중국을 침략한다. 현지에 부둔하던 일본군과 중국측 경비부대가 소규모로 충돌하였는데, 이 사건으로 오히려 중국 파병을 늘리게 되면서 중일전쟁이 본격적으로 확대되게 된다. 일본은 중일전쟁을 '루거우차오사건'등으로 부르면서 축소하려 했다.
경과
루거우차오에서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발발했다. 이후 일본은 베이징, 톈진 점령에 이어 상하이로 전쟁을 확대시켰다. 익히 알고 있는 난징대학살 사건도 이 때 발생했다. 1937년 12월 중화민국의 수도 난징에서 민간인 수십만 명을 살육하고 여성을 강간, 약탈한 사건이다. 중국은 당시 국민당과 공산당 간의 내전으로 혼란을 겪고 있는 시기였지만, 일본에 대한 대응이 시급했기에 국공합작을 이루어 대응하기 시작하였다. 중국의 대응은 일본군을 어느 정도 막아내는 데 성공하였지만 일본은 공격을 계속 진행해 1200만 명의 중국인을 살육했다.
중국의 항전으로 전쟁은 장기화되었고, 일본은 중일전쟁의 전선을 동남아시아로 확대하였고, 태평양까지 전선을 확대했다. 미국 하와이 진주만 기습으로 중일전쟁은 태평양전쟁까지 확대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밑에 '태평양전쟁' 항목에 기술하였다.
태평양전쟁
요약
1941년 12월 8일부터 1945년 9월 2일 일본이 항복하기까지 일본,미국,영국을 비롯한 다른 연합국간에 이루어진 전쟁이다.
배경
중일전쟁이 발발하고 1938년 11월 3일, 8일에 발표한 성명에서 일본은 중일전쟁이 동아 신질서 건설을 목표로 하며, 이전에 만들어진 9개국 조약과 같은 국제규범으로 이 전쟁을 규율할 수 없다라고 입장을 발표한 바 있다. 이는 미국, 영국과 더 이상 협조하지 않겠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미국은 이에 대응하여 1938년 12월 성명에 반대하는 통고를 전달하였고, 영국, 프랑스와 군사협력을 추진하려 하는 등 군사적 대응을
취했다. 그리고 미국이 일본과 체결하였던 통상항해조약을 폐기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제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였다. 1940년 7월 고노에 후미마로가 내각을 재조직하면서 일본이 독일과의 동맹 체결 쪽으로 외교적 전략이 수정되고 독일, 이탈리아와 3국 동맹을 체결한다. 이에 미국과 영국은 재미자금을 동결하는 등 항전 태세를 취했다.
1941년 11월 26일 야마모토 이소로쿠 제독의 지휘 하에 연합함대를 출함시켜 12월 7일, 하와이 진주만에 정박중이었던 미 전함들에 대한 공격을 가하였다. 또, 영국이 관할하고 있던 홍콩과 말레이시아, 미국의 관할 하에 있던 필리핀에 대한 공격이 시작되며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였다.
경과
진주만 기습은 성공하였다. 미국 함정 16척, 항공기 177대를 파괴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일본의 진주만 공격 당시 항공모함 3척이 바다에 있어 타격을 입지 않았다. 또, 진주만 해안의 군사시설과 유류 저장 설비도 타격을 입지 않았다.
진주만 공습으로 미국은 세계 2차 대전에서 한 발 물러 서 있던 태도를 바꾸어 2차 대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진주만 공습에 뒤이어 일본은 동남아시아 및 태평양 지역을 점령하기 시작했다. 이에 대한 대응으로 미국은 오스트레일리아와 남태평양을 잇는 선을 확보하려 하였다.
그러다 미드웨이 해전 때 일본은 병력을 쏟아부었는데, 그 이후 전투에서 미국이 큰 승리를 거두었다. 미국은 일본의 대형 항공모함 4척 격침과 대형 순양함 1척 침몰을 결과를 거두었다. 일본은 이로 인해 병력 손실을 겪었고 미국이 승기를 잡기 시작했다.
연합군은 일본이 점령한 지역을 다시 탈환하기 시작했고 결정적으로 미국이 나가사키와 히로시마에 원자 폭탄을 투하하면서 일본이 패배했다.
일본은 1945년 8월 15일 패전을 선언했다.
한국에 미친 영향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은 일본이 제국주의적 야욕을 부려 일으킨 전쟁으로 한국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일본 제국주의의 시작이라고 볼 수 있었던 한국에 대한 식민지배는 세계 2차 대전 일본의 패망으로 끝이 났다.
또 중일전쟁을 전후에 일제는 전시총동원체제를 확립하였고 내선일체를 주장하였다. 조선총독부는 황민화 정책이 조선인 개개인에게 스며들도록 하려 했다. 창씨 개명도 징병제를 위한 준비 중 하나라고 볼 수 있다.
실제로 많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강제로 동원되었다. 노무 동원이 강제로 이루어졌고 1944년부터는 국민징용령에 의해 징용이 실시되었는데, 만 16세 이상 40세까지의 모든 청장년에게 적용되었다. 강제동원된 노동자의 추산치는 일본만 72만 명이라는 추산도 존재하고 150만 명이라는 추산도 존재한다. 강제로 동원된 노동자들은 혹독한 환경에서 착취를 당했다.
또 강제동원의 다른 형태는 여성 동원이었다. 1930년대 말부터 착취된 여성 노동자는 열악한 환경에서 노동을 하였다. 또 '위안부'로의 강제동원이 이루어져 성착취도 일어났다. 성노예로 인권을 유린다안 이들은 전쟁이 끝난 후에도 고향에 돌아오지 못하였다.
일제의 패망으로 태평양전쟁이 종결되고 우리나라는 해방을 맞이하게 된다. 그 후 한국전쟁이 일어나게 된다.
참고문헌
. (2023). 중일전쟁의 개전과 1930년대 동아시아 국제정치. 일본역사연구, (), 157-203. 10.24939/KJH.2023.8.61.157 21세기 정치학대사전 중 태평양전쟁 문서 박영준 (Park Young-June). (2023). 미국과 일본 간 태평양전쟁 개전과정 재조명, 1906-1941: 패권전쟁 발발의 다층적 요인을 중심으로. 국제정치논총, 63(2), 89–125.
각주
- ↑ 1936년 6월 8일 개정된 '제국국방방침'에서 이런 의도를 확인할 수 있다. '제국국방방침'에는 "동아 대륙 및 서태평양을 제어하고, 제국 국방의 방침에 기초한 요구를 충족할 수 있는"수준을 요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