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전쟁

dh_edu
낭만가 (토론 | 기여)님의 2024년 6월 21일 (금) 21:29 판
(차이) ← 이전 판 | 최신판 (차이) | 다음 판 → (차이)
이동: 둘러보기, 검색

베트남전 파병 한국인들
베트남전에 파병되는 한국 군인들의 모습이다.

개요

국사편찬위원회 산하 우리역사넷의 개념 정의에 따르면 베트남 전쟁은 1960년부터 1975년 4월 30일까지 지속된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NFL)과 미국 사이의 제2차 인도차이나 전쟁이다.
남베트남 내의 반정부 세력인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과 남베트남 정부 사이의 내전(內戰)으로 시작했으나, 1964년 8월 7일 미국이 통킹만 사건을 구실로 북베트남을 폭격한 뒤에 전쟁은 미국과의 전면전으로 확대되었다.

한국군 파병 배경

박정희 정권의 정당성 인정 욕구

박정희는 5.16쿠데타를 통해 정권을 잡았기 때문에 정통성이 없었고 1961년 쿠데타 당시의 미국 대통령 존 F. 케네디 대통령은 박정희 정부에 미온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정권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미국으로부터 정당성을 인정받는 것은 필수적이었고 주한미군의 규모 유지 요청 및 한미동맹 강화 의지를 보이고자 한국은 계속해서 베트남에 파병할 것을 요청했다.

미국의 이해관계

미국은 초반에 박정희 정권에 대한 정당성을 크게 인정하지 않고 있었고 따라서 한국의 참전 제안에 미온적이었으나, 1964년 통킹만 사건 이후 자유진영 국가들에게 적극적으로 파병 요청을 하게 되며, 한국의 파병 요청에 대한 태도도 바뀐다. 또한, 자국 내 반전시위가 격화되어 병력 차출이 어려워지자, 파병 필요성이 커졌고 한국군은 같은 아시아인이면서도 유지 비용이 저렴했기 때문에 한국군의 파병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파병 규모

누계 합산 30만 이상 병력을 약 8년 6개월 동안 베트남에 파병했다.

당시 한국 정치에 미친 영향

베트남 전쟁 파병으로 인해 베트남 특수가 왔고 신흥 대기업이 성장하는 등 한국의 경제 성장은 가속화되었으나, 그 과정에서 군인이나 노동자에 대한 보상이 불충분한 문제가 발생하였다. 따라서, 박정희 정부에 대한 불만이 고조되거나, 노동자들이 빌딩에 불을 지르는 등의 혼란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또한, 박정희 정부는 전투 파병 인원과 그로 인한 공백을 메울 인원을 모집하기 위해 21~30살의 청년들을 징병했다. 이 과정에서 징병 기피자들, 24살 이상 대학생들, 장기 휴학생들을 대상으로도 집요하게 징병하였고 예비역을 재입대 시키기도 했다. 이를 통해 박정희 정권에 불만을 품고 저항할 가능성이 가장 높은 세대 중 하나인 20대 남성 청년 세대에 대한 통제 시스템을 강화할 수 있었다. 또한, 원활한 징병 등 여러 이유를 근거로 주민등록법을 시행하여, 전 세대를 대상으로 통제를 강화했다. 이러한 통제 시스템은 차후 박정희 정권의 유신 개헌에 대한 반대를 용이하게 통제하도록 했고 독재 체제 강화 및 유지의 밑거름이 되었다.

관련 영상

참고문헌

<<베트남전의 영향 및 배경과 관련하여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베트남전쟁 파병" 참조>> <<베트남전의 파병 배경과 관련하여는 우리역사넷, "월남전은 우리에게 무엇이었나", 노도희. (2015). 박정희 대통령의 베트남 파병에 내포된 국가정체성 [석사학위논문, 이화여자대학교]. http://www.riss.kr/link?id=T13819087 참조 >>

분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