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바틴
개요
사바틴은
정보
- 출생:
- 사망:
생애
ㅇㅇ
1911년 세브란스의학교를 졸업하여 의사가 되었고 이때부터 안창호 선생[1]과 친분을 쌓아 독립운동에 투신하게 된다.
기타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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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공사관의 설계자는 러시아인 사바찐 (Afanasij Ivanobich Seredin Sabatin, 薩巴 丁, 薩巴珍, 薩巴玲, 1860-1921) 으로 알려져 있다. 사바찐에 대한 연구는 몇몇 논문을 통해 대략 밝혀진바 있지만10) 아직 그의 건축전문 교육과 러시아에서의 이력, 건축기술 수준 등 에 대해서는 명확히 규명된 적이 없다. 다만 최근 러시아 학자 따찌아나 심비르쩨바 (Simbirtseva Tatiana Mikhailovna)의 연구에 의해 사바찐의 가족과 학력에 대해서 보다 상 세한 자료가 밝혀졌다. 그는 19세기 말 서양건축이 처음으로 이입 될 개항기에 인천과 서울에 거주하면서 20 여 개의 건물11)을 설계하고 기술자문과 시공 감 독을 하였다. 사바찐의 학력과 건축수련과정을 통해 그의 건축기술적인 능력을 살펴보면 다음 과 같다. 사바찐은 1860년 우크라이나 뽈따바(Poltava)주의 몰락한 지주 집안에서 태어났 다.12) 14세 때 상선단의 소년수부가 되었으며, 상뜨-뻬쩨르부르그에 있었던 항해사 양성 강 습소(maritime classes)13)를 수료하였다. 지금 까지 잘못 알려져 온 바와 같이 “2급 자격증 을 수여하는 러시아 육군유년학교 공병과를 나 왔다”14)는 것은 1895년 9월 그가 당시 조선에 신설되는 러시아어학교의 교사로 자신을 천거 해 달라는 내용의 공사관으로 보낸 서한과 답 변15)에 근거한 것 같다. 여기서 ‘2급 자격증’은 ‘항해사 양성 2급(근거리항행 상선 선장 및 원 양항해사 자격)과정’으로 추정된다. 그는 상뜨-뻬쩨르부르그에 있으면서 뻬쩨르 부르그 예술아카데미에 1년간 다녔다한다. 이 예술 아카데미는 1757년 이래 조형예술분 야에서 러시아제국 최고의 교육기관이다. 1859 년부터는 회화․조각학과, 건축학과 등 두 개 의 학과가 있었으며, 이 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서는 예비지식이 요구되었는데 사바찐은 그것 이 없었기 때문에 정규수강생이 될 수 없었고, 일반인을 대상으로 무료로 진행되는 야간미술 강좌를 수강하였다. 그는 선박 항해사로 취업17)하였으며 승무원 으로 일하는 동안 극동의 여러 나라들과 도시 들의 건축문화를 접할 수 있었을 것으로 생각 된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을 통해 상해로 진출 하였으며, 자신의 독학, 통찰력, 개인적인 재능, 그리고 선원으로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건축․ 토목 기술자로 변신한 것으로 보인다. 비 유럽권에서 ‘건축’의 전문교육과 ‘건축가’ 라는 직업이 생겨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 다. 러시아에서는 뾰뜨르 1세때(18세기 초)이 고 우리나라와 일본은 20세기 초이다. 명동성 당을 비롯한 교회건축의 설계자는 경리관계일 을 맡은 아마추어 성직자들이 대부분이었다. 당시 이름 있는 공공건물들도 공식적인 자격증 이 없는 사람들이 건립한 사례가 많았으며, 사 바찐도 그러한 사람들 중의 하나로 생각된다. 당시 각국 정부 혹은 상사의 초청으로 아시 아 여러 지역의 거류지들을 유랑하며 일한 이 들 서양 기술자들은 거류지 건축가(Colonial Architect), 또는 거류지 기술자(Colonial Engineer)라 불렀다. 이들에게 맡겨진 일은 도 로 조성, 하천과 항만 준설, 거류지 계획과 측
량 등이었으며 사바찐도 ‘토목사’, ‘건축사’, 영조사 등으로 불럿
- ↑ 일제강점기 때, 독립협회, 신민회, 공립협회, 흥사단, 임시정부 등에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고, 신문 발행 및 학교 설립을 통해 민중운동을 전개한 교육자이지 독립운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