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0년대
1941년에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고 침략전쟁을 위한 일본의 발악이 극에 달하면서 1942년부터는 노골적인 친일 내용을 담은 군국가요만 발매된다. 1940년에 일제는 방송에서 재즈음악을 금지했고, ‘유행가’라는 용어 대신에 ‘가요곡’이나 ‘신가요’라는 말을 사용하게 했다. 그러다가 1943년에는 아예 음반 발매를 중지하기에 이른다. 그러므로 1942년부터 1945년까지는 음반 산업이 완전히 위축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음반 산업이 위축되어 음반 회사가 문을 닫으면서 음반을 중심으로 유통되던 대중음악은 새로운 활로를 찾아야 했다. 그 타개책으로 음반이 아니라 악극 중심으로 대중음악이 향유되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오케 회사의 이철이다. 오케 음반 회사는 1933년부터 이미 ‘연주회’라는 명칭을 빌려 전속 예술가의 순회공연을 벌이곤 하였다. 그러다가 음반의 운영권을 데이치쿠 회사에 양도한 후로 이철은 악극 공연에만 주력한다. 이철은 1938년에 조선연예주식회사를 설립한데 이어 오케연주단을 오케그랜드쇼로 확대하고, 1939년에는 조선악극단으로 이름을 변경하여 해외를 돌며 공연하기에 이른 것이다.
1940년에는 빅타 음반 회사에서 반도가극단을 창단하고 1941년에는 성보가극단, 약초가극단 등이, 1944년에는 신태양악극단과 태평양예능대 등이 결성되어 음반을 대신할 대중음악의 활로가 열렸다. 물론 악극은 대중음악뿐만 아니라 연극 등의 다양한 레퍼토리로 구성되었으나, 그 중심에는 대중음악 가수들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