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돌멩이의 외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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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미서 (토론 | 기여)님의 2023년 12월 12일 (화) 00:21 판 (어느 돌멩이의 외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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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돌멩이의 외침

작가

유동우 작가

유동우 작가는 1949년에 태어났으며, 어릴적부터 매우 가난했다. 초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나무를 해다 팔며 생계를 도왔다.
열아홉 살에는 상경하여 섬유공장에서 하루에 12시간씩 근무했다.
그러나 그는 그런 상황 속에서 매번 열악한 노동환경과 계급 격차에 마주했다. 이를 깨달은 그는 섬유 공장의 민주노조를 만들어으며, <어느 돌멩이의 외침>이라는 책을 출간했다. 그는 민주노조를 결성했다는 이유로 해고되었다.
또한 그가 출간한 <어느 돌멩이의 외침>은 금서로 지정됐다.
1979년 전두환 신군부의 12.12사태 이후, 유동우 작가는 민주화운동에 힘을 보탠 인물이었다. 이러한 활동으로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에 끌려가 매우 가혹한 고문을 받았다. 현재는 남영동 민주인권기념관에서 민주인권 교육 길잡이로 활동중이다.

  • 자살 시도와 대인기피증

“두 눈을 가린 천을 풀어보니 사방이 빨간색으로 칠해진 방이었다. 다짜고짜 ‘공산주의자냐’고 묻기에 아니라고 했더니 ‘그럼 사회주의자네’라며 무차별 구타와 고문을 시작했다.”

유동우는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혹독한 고문을 당해 한 달간 경찰병원에 세 번이나 실려갔다. 집단 구타와 고춧가루 물고문을 당하며 갈비뼈 3대가 금이 가고, 치아 4개가 부러졌다. “법정에서도 소변을 줄줄 흘릴 정도로 몸이 망가진 것을 보고 재판부가 들어가서 누워 있으라고 하더니 결국 집행유예로 풀어줬다.” 출소 이후 적절한 치료를 받을 수 없었다. 가난 탓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신체적·정신적으로 황폐해졌다. 혼자 먼저 석방된 것에 대해 미안함·자괴감으로 괴로웠다. 환청에 시달리거나 자다가 소리를 질렀다. 게다가 1987년 구로구청 농성사건[1] 때 국민운동본부 상임대표였던 그는 또 한 차례 끌려가서 두 달 반 동안 징역을 살았다. 몸은 점점 쇠약해져갔다. “방에 혼자 있으면 누가 꼭 총을 들고 잡으러 오는 것 같아 수시로 집을 나가 서울역, 신촌 등지에서 몇 달이고 노숙을 했다. 수차례 자살을 시도했고 극도의 대인기피증을 겪었다.

작품

책소개

인천 삼원섬유 노동자 유동우는 전태일 열사를 이어 현장을 누비며 노동법 교육에 앞장섰다. 1978년 유씨는 참혹한 노동 실상을 다룬 자전 수기 〈어느 돌멩이의 외침〉을 펴냈다.

줄거리

  • 첫 직장, 왕십리 천일섬유

하루 12시간 노동 착취를 당했으나, 기술을 가르쳐주는 것이 그 노동에 대한 대가라는 이유로 임금을 받지 못했다. 근로기준법 위반이었다.

  • 두번째 직장, 중곡동의 유림통상

숙련공이 될 때까지 숙식을 해결해주는 곳이었기에, 이전 직장보다는 낫다고 생각했으나 노동 착취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 당시 유동우는 영양실조와 폐결핵으로 살아가는 데 어려움이 컸다.

  • 금은방 세공 보조

금은방 세공에서 일을 하는 것은 굶주림이나 열악한 노동 환경으로부터 어느 정도 해방을 시켜주었으나, 계급 격차를 심하게 보여주는 공간이기에 마음이 편치 못했다.

  • 다시 돌아간 섬유공장

다시 그는 섬유공장으로 돌아갔다. 여전히 근로기준법이 지켜지지 않고 있었고, 노동 환경은 매우 열악했다. 이러한 노동 환경에 유동우는 절망했으나, 이후 삼원섬유에서 민주노조를 결성했다. 그는 해고를 당하고 업무방해 혐의로 구속되었다.

  • 다윗의 '돌멩이'가 되기로 결심하다

유동우는 더 큰 민주노조의 꿈을 키웠고, 다윗의 '돌멩이'기 되기로 결심했으며, 이렇게 살아온 그의 일대기를 글로 써 단행본 <어느 돌멩이의 외침>으로 출간된 것이다.

각주 (참고 페이지)

  1. 13대 대선 당시 부정선거 의혹이 불거져, 이에 항의하는 시민 등이 투표 장소인 구로구청을 점거한 사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