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일쇼크

dh_edu
Ggrace (토론 | 기여)님의 2023년 12월 11일 (월) 19:32 판 (개요)
이동: 둘러보기, 검색

개요

1978년~1981년 사이 현저히 낮은 경제성장률

석유파동, 유류파동으로도 불리는 오일쇼크는 두 차례에 걸친 석유 공급 부족과 석유 가격 폭등으로 세계 경제가 큰 혼란과 어려움을 겪은 일이다. 1973~1974년 중동 전쟁 시기 아랍의 석유 수출 국가에서 석유 자원을 무기화한 정책과 1978~1980년의 이란 혁명으로 석유 생산량이 대폭 감축되어 석유 공급이 부족해지자 국제 석유 가격이 급등했고, 결과적으로 전 세계가 경제 위기를 겪었다. 제1차 오일쇼크로 인한 불황은 1975년부터 미국, 유럽, 일본 등의 국가경제가 호전되면서 경기 상승으로 전환되었으나 1978년, 제2차 오일쇼크는 한국 경제에 거대한 타격을 주었고 경기 침체는 유신정권이 끝난 후인 1980년대까지 이어졌다.

제1차 오일쇼크

1973년 10월, 이집트 군이 이스라엘을 공격하면서 제4차 중동전쟁이 발발했다. 당시 서방 국가들은 이스라엘에 대한 원조를 공여했고 이는 아랍 국가들을 단결하게 하였다. 석유수출국기구[1]를 만들어 가입 국가들이 석유를 무기화한 것이다. 이들은 석유의 가격을 70% 인상했고, 그 해 12월에 다시 석유 가격을 128% 인상했다. 1973년 말 3달러에서 1974년 초에 13달러로 짧은 기간 동안 국제 유가가 약 4배 상승하고 말았다. 이러한 원유 가격의 폭등으로 세계 물가가 상승하였다. 1975년 하반기부터 미국, 유럽, 일본 각 국가의 경제가 호전되면서 상황이 나아졌다.

제2차 오일쇼크

제1차 석유파동을 겪은 한국정부는 1975년 말 ‘물가안정 및 공정거래에 관한 법률’을 제정하여 물가의 행정규제를 강화하였고, 그 결과 물가가 어느 정도 안정되었다. 그러나 이 시기의 물가안정은 근본적인 인플레이션이나 통화팽창의 문제점을 해소했기 때문에 나타난 것이라기보다는 물가 압력을 단순히 잠재화시키는 것이었다. 그렇게 잠시 덮어두었던 경제 위기는 1978년 12월 발생해 1981년 말까지 이어진 제2차 오일쇼크와 함께 수면 위로 다시금 떠올랐다. 한국경제는 1979년 상반기까지 10%이상의 높은 경제성장률을 보였으나 하반기부터 국내외 수요가 빠르게 둔화되어 6.4%로 낮아졌다. 석유 가격 등 원자재 가격의 상승 문제뿐만 아니라 중화학공업 중복, 과잉 집중투자 문제로 중화학공업의 생산률이 크게 떨어진 것 등이 문제가 요인이 되어 인플레이션의 압력이 상승하였다.

의의

제1차, 2차 오일쇼크 이후 우리나라 정부는 에너지의 안정적 공급과 위기대응 능력 배양, 해외 자원개발 및 신재생에너지 투자 확대, 에너지절약 이라는 큰 틀에서 에너지정책 기조를 유지하고 있다. 정부는 정유사의 생산시설 가동률 및 생산수율 제고, 적정 수입확보 및 재고유지, 석유저장시설의 탄력적 활용, 석유제품 수송원활화, 소비자보호 및 불편요인 방지 등의 대책을 매년 마련하여 추진해 오고 있으며, 1980년부터 석유비축사업을 시작하기도 했다.

경제정책부문에서의 의의뿐만 아니라 부마항쟁과 관련해 생각해볼 수도 있다. 부마항쟁의 원인은 크게 정치, 경제, 노동 문제로 이해할 수 있었다. 오일쇼크는 그중 경제 부문에서 불만을 일으켰다. 오일쇼크와 경제위기로 인해 1979년 당시 기업의 부도율이 오르고 하층민들의 생활이 더욱 피폐해졌으며, 정부가 중화학공업에 집중투자하였음에 따라 부산과 마산의 제조업 상황이 불황을 맞은 일이 주 원인이었다. 또한 오일쇼크와 함께 물가 폭등, 부동산 투기 과열, 부가가치세 도입 등이 당시 시민들을 힘들게 했다.

각주

  1. OPEC: Organization of Petroleum Exporting Countri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