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무지 개간 반대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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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nsu0506 (토론 | 기여)님의 2023년 12월 11일 (월) 15:15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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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무지 개간 반대 운동

정의

1904년부터 1905년 사이에 일어난 러시아와 일본 간의 제국주의 전쟁으로, 한반도를 놓고 벌어진 양국의 쟁탈전이다.

[[파일: |400px|center|출처:네이버 시사상식사전]]

배경



제1차 한일의정서 체결

- 1868년 도쿠가와 막부 정권이 막을 내리면서 일본에서는 일왕을 중심으로 하는 강력한 중앙집권체제가 시작되었고, 그와 함께 산업화와 군대의 현대화가 진행되었다. 일본은 징병제를 도입하여 군사를 육성하고, 육군 장비와 훈련에는 독일제도를, 해군장비와 훈련에는 영국제도를 채택하여 강력한 군대를 형성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산업화와 군 현대화를 통해 일본은 제국주의적 야욕을 품게 되는데, 이러한 일본의 입장에서 한반도는 대륙 진출의 발판으로 장악할 필요가 있는 지역이었다.

1894년부터 1895년에 일어난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청나라와 시모노세키조약을 체결해, 조선에서 청나라의 영향력을 제거하였다.


「대한정책」

- 이에 러시아는 독일과 프랑스를 끌어들 삼국간섭을 주도함으로써 이를 좌절시키고 일본에 대항하기 위한 러·청비밀동맹을 체결함과 아울러 동청철도부설권(東淸鐵道敷設權)을 획득하였다. 그리고 독일의 자오저우만(膠州灣) 조차를 계기로 1898년 여순(旅順)과 대련(大連)을 25년간 조차, 만주를 세력권화하려 하였다.
- 1900년 중국의 의화단 사건을 계기로 만주를 사실상 점령해 남하정책을 추진하는 등 일본을 견제하게 된다.


계약서안

- 이에 대해 일본은 1904년 2월 4일 대(對)러시아 개전 및 국교단절을 결정하고, 2월 8일에는 육군 선발대가 한국의 인천에 상륙하여 서울로 향하는 한편 중국 뤼순(旅順)의 러시아 함대를 공격하였다. 그리고 2월 9일에는 인천 앞바다에서 일본러시아 함대와 격돌하였으며, 10일 러시아와 일본은 각각 선전포고를 하고 전쟁을 시작했다.


반대운동 시작

  • 1902
- 영국과 영일 조약을 맺어[1] 영국의 지원을 약속받으며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
당시 러시아 측은 러일전쟁에서 불리한 위치에 있었다.
왜냐하면 전장으로 향하는 길을 시베리아가 가로막고 있어 병력과 물자 보급이 느릴 뿐더러, 러시아 내부적으로는 짜르인 니콜라스 2세의 무능함으로 정권이 불안한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반면 일본은 전쟁 즉시 투입할 수 있는 25만 명의 상비군과 그 두 배의 예비군까지 갖춘 상태였다.
  • 1904.02.08
- 저녁에 일본은 먼저 바다를 장악하기 위해 여순항을 기습해, 항구에 있던 러시아 전함을 격침시켰다. 이어 일본군은 항구를 봉쇄하고 육지부터 점령을 시작했다.
  • 1904.02.09~10
- 일본은 9일 인천 앞바다에 있던 두 척의 러시아군함을 격침시킨 다음날인 10일에야 선전을 포고하였다. 여순 봉쇄에 성공한 도고(東鄕平八郞)함대는 5월 5일 요동반도에 상륙하고, 4월 말 한국을 거쳐 북진한 제1부대는 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진입하였다.
  • 1905.01~05
- 일본은 1905년 1월 1일에 여순항을 점령할 수 있었다. 또 요양, 사하, 봉천 등 만주벌판에서도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가운데 일본의 육군은 한반도를 거쳐 남만주로 진격하여, 봉천을 점령하였다. 
반면 러시아의 발틱 함대는 여순항 함락 이후에나 극동에 도착하였고 그나마도 1905년 5월 27일 대한해협에서 일본의 도고 함대에 격침당했다. 그러나 일본의 당초 예상과 달리 전쟁이 길어지고 막대한 전쟁비용 등으로 전력이 부족하게 되었으며, 러시아 역시 자국의 혁명운동 발발로 민심 수습이 필요했다.



결과

1905년 9월 5일, 결국 러시아는 미국의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의 중재하에 일본과 포츠머스 강화조약을 체결한 후 휴전한다.

이 조약을 계기로 일본은 한반도에서의 우월한 지위를 획득하였고 러시아는 일본에게 여순·대련의 조차권(租借權)과 남만주의 철도(東淸鐵道)를 양도했다. 또 사할린 남부를 할양, 북위 50도 이남을 일본령으로 하였으며, 연해주와 캄차카의 어업권을 인정하였다.

전쟁의 직접적인 결과는 한국에서는 물론이고 남만주에서 일본이 지배권을 확립하였다는 사실이다. 한국에 을사조약을 강요한 뒤 일본은 러시아로부터 얻지 못한 것을 청나라로부터 보상받으려고 하였다.
아시아의 강자로 떠오른 일본과 달리 러시아는 러일전쟁의 패배로 국민들의 불만이 고조되면서 혁명의 불씨로 작용하게 된다.

출처:네이버 시사상식사전


역사적 의의

  • 러일전쟁은 표면상으로는 한반도와 만주의 분할을 둘러싼 러시아와 일본 간 싸움이었지만, 그 배후에는 영일 동맹, 미국의 일본 지원, 러시아-프랑스 동맹이 복잡하게 얽혀있던 제국주의 전쟁의 전초전이었다.
  • 고종이 러시아에 접근하여 러시아를 조선 안으로 깊숙이 끌어들였고, 조선을 러시아의 속국 상태로 만들었다.
  • 러일전쟁에서 승기를 잡은 일본은, 한국에 대한 지배권 확립을 꾀했다.이 과정에서 황무지 개간권 요구로 이어졌으며, 이는 보안회 설립의 시초가 되었다.


참고문헌

기여

  • 러일전쟁과 황무지 개간권에 대한 자료 조사 내용을 바탕으로 러일전쟁으로부터 이어지는 과정, 그리고 황무지 개간권에 대한 사횢거 사건들과 결과까지 흐름을 중심으로 정리하였다.
  • 정보 수용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관련된 유튜브 링크를 첨부했고 중간에 외부 링크를 삽입해 전개 과정에서의 흥미를 이끌었다.


각주

  1. 러시아와의 대결에 있어 일본을 적극 지원한 세력은 영국과 미국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