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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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한국광복군(韓國光復軍)의 약칭은 광복군은 1940년 9월 15일 충칭(重慶)에서 창설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정규 군대이다.
정보
- 명칭: 한국광복군(韓國光復軍)
- 약칭: 광복군
- 창립: 1940년 9월 17일, 중국 충칭
- 해산: 1940년 9월 7일~1946년 5월 말
- 동맹단체: 국민혁명군
- 병력: 339명~564명
- 본부: 중화민국 충칭
- 상위단체: 대한민국 임시정부
- 참여전투: 한국 독립운동, 태평양 전쟁, 중일 전쟁, 버마 전역, 서울 진공 작전(1945년)
한국광복군 선언문
1940년 9월 15일에 한국광복군창설위원회 위원장 김구 명의로 한국광복군 선언문이 발표되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대한민국 元年에 정부가 공포한 군사조직법에 의거하여 중화민국 총통 蔣介石元帥의 특별 허락으로 중화민국 영토내에서 광복군을 조직하고 대한민국 22년 9월 17일 한국광복군 총사령부를 창설함을 玆에 선언한다. 한국광복군은 중화민국 국민과 합작하여 우리 두 나라의 독립을 회복하고자 공동의 적인 일본 제국주의자들을 타도하기 위하여 연합군의 일원으로 항전을 계속한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 겸 한국광복군 창설위원장 김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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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성원
창설 당시
- 총사령관 : 지청천[1]
- 참모장 : 이범석
- 총무 처장 : 최용덕
- 참모 처장 : 채원개
- 부관 처장 : 황학수
- 경리 처장 겸 정훈처장 : 안훈[2]
- 훈련 처장 : 송호[3]
- 군무 처장 : 유진동
- 제 1지대장 : 이준식
- 제 2지대장 : 김학규
- 제 3지대장 : 공진원
- 제 5지대장 : 나월환
활동
참여전투
한국의 독립운동
태평양 전쟁
중일 전쟁
- 날짜: 1937년 7월 7일 ~ 1945년 2차세계대전 종결
- 장소: 북경 서남 교외의 노구교, 남경(난징), 상해 등 중국 각지
- 특징: 남경대학살(난징대학살)[4]
- 경과: 루거우차오 사건을 빌미로 전쟁을 시작한 일본은 난징대학살과 같은 끔찍한 만행과 함께 전쟁 초기 중국을 압도하였다. 이에 대응하기 위해 중국은 당시 국민당과 공산당으로 나뉘어져 치열하게 대립하고 있었던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서로 힘을 합쳐 장제스를 총사령관으로 하는 국공합작 군대를 조성해 일본군과 맞섰다. 이후 미국과 소련 등의 연합군이 각각 중국을 지원하게 되면서 점차 중일전쟁은 확대 및 고착화되어 갔다. 이후 1945년 점차 2차세계대전에서 패색이 짙어지게 되고 미국에게 히로시마,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당하게 되면서 일본은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고, 이로 인해 중일전쟁도 막을 내리게 되었다.
- 결과: 일제의 항복으로 종결.
버마 전역
- 날짜: 1942년 1월~ 1945년 7월
- 장소: 버마[5] 전역
- 결과: 연합군의 결정적 승리
버마 전역이란 태평양 전쟁 중 일본 제국이 타이를 출발하여 영국령 인도 제국을 공격하는 과정에서 영국령 버마에서 벌어진 일련의 전투를 의미한다. 이 전투에서 영국군을 중심을 미국군과 중국 국민혁명군이 연합군을 이뤘다.
서울진공작전
- 날짜: 1945년 8월 18일
- 장소: 경성부 및 인천
- 별칭: 독수리 작전[6]
- 결과: 일제의 항복으로 무산
서울 진공 작전은 1945년 8월 18일에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미군의 도움을 받아 서울을 탈환하려고 했던 작전이다. 미군의 지원(전투기, 잠수함, 공수 부대 등)을 받기로 했으나 일제의 항복으로 무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