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주 고달사지 원종대사탑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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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 보물로 지정

특징

건축시기 및 위치

경기도 여주시 북내면 고달사터에 위치한 고려전기 탑비의 받침돌으로 높이는 2m이다. 현재는 귀부[1]와 이수[2] 만이 남아 있고, 비신(碑身)[3]은 경복궁 근정전 회랑에 진열되어 있다.

형태

  • 용의 눈과 코

용은 눈을 부릅떠 정면을 직시하고 있는데, 눈꼬리가 길게 치켜올라가 매우 험상궂은 모습이다. 코는 들려서 콧구멍이 깊게 표현되고 중첩된 주름이 정수리까지 이어져 있다.

  • 얼굴 형태

일반적으로 여의주를 물고 있는 모습과는 달리 입을 꽉 다물어 여의주를 물지 않은 형태이며, 길게 찢어진 입 가장자리에는 공룡의 깃과 같은 물갈퀴 형상이 조각되었고, 그 뒤로 갈기 같은 털이 머리 뒤까지 길게 뻗쳐 있다.

  • 몸의 형태

앞발은 귀갑 전면 양단에 가지런히 두었으나 마치 땅을 밀치고 나가려는 듯 격동적이고, 사실적으로 표현된 발톱은 땅을 꼭 누르고 있는 듯하다. 발은 크고 두툼하며, 5개의 발가락과 발톱이 상세하게 표현되어 있는데 큰 발로 지대석을 누르고 버티어 앉은 모습으로 한껏 사실감이 돋보인다.

고달사 터.jpg

보유 석탑

  • 여주 고달사지 승탑

각 부분의 조각들에서 고려 특유의 기법을 풍기고 있어 고려시대 전기 10세기 즈음에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거북이를 사이에 두고 네 마리의 용이 새겨져 있으며, 나머지 공간에는 구름무늬로 가득 채워져 있다. 가운데 돌을 중심으로 그 아래와 윗돌에는 연꽃무늬를 두어 우아함을 살리고 있다. 지붕돌 꼭대기에는 둥그런 돌 위로 지붕을 축소한 듯한 보개(寶蓋)가 얹혀져 있다.


설화

  • 신라시대에 고달(高達)[4]
사냥꾼이던 고달은 사슴 한 마리를 사냥하게 되었는데, 화살을 맞고 사슴이 달아나게 되었다. 사슴의 핏자국을 따라가다 보니 불상을 모신 굴이 있었고, 그 불상에 화살이 꽂혀 있었다고 한다. 고달은 그 불상을 보며 부처님이 자신이 살생을 많이 하는 것을 훈계하기 위해 부처님이 사슴으로 변신해서 자기를 인도한 것임을 깨닫고, 그 자리에서 활과 살을 꺾어버린 뒤 수행하여 스님이 되었다고 한다. [5] 
  • 고달원 입구‘신털이봉'이 생긴 사연
원종대사 찬유는 중국에 수기설법을 유학하고 돌아와 선풍을 진작시켰다. 그는 고려 태조, 혜종, 정종, 광종으로부터 극진한 예우를 받았다. 특히 고려 광종의 개혁에 큰 힘을 보태어 953년(광종 4) 국사로 책봉되었다고 한다. 만년에 고달사로 내려와 머물면서 대찰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수기설법(隨機說法)은 마치 깊은 골짜기에서 부는 회오리바람 소리와 같고, 인연 따라 감응하는 것은 맑은 못에 비치는 달그림자와 같았다,“누더기를 입은 납자(衲子)가 바람처럼 찾아오고, 대중공양을 올리기 위해 오는 이가 구름과 같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이로 인해 수많은 스님이 이곳을 찾아올 때 고달원 입구 500m 전에서 짚신을 턴 흙이 쌓여 신털이봉이 생겨났다고 한다.[6]

출처

  1. 비석의 받침돌
  2. 비신의 꼭대기에 표현된 용
  3. 비문을 새긴 돌
  4. 고달은 가족들이 굶어 죽는 줄도 모르고 불사에 혼을 바쳤다고 한다. 이라는 승건이 창건했다는 설이 전해지고 있다.
  5.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03371
  6. https://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2203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