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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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개요

생몰년도 1885년~1932년. 교육자, 사업가, 독립운동가. 고려대학교의 전신 보성전문학교의 2대 교주(校主)를 맡았었다. 고려대학교의 설립자인 충숙공 이용익 선생의 손자이다.


생애

이종호는 1885년 함경북도 명천군에서 고려대학교 설립자인 이용익(李容翊)의 손자이자 이현재(李賢在)의 아들로 태어났다.

1907년에 보성전문학교의 설립자인 할아버지가 죽자 그의 뒤를 이어 보성전문학교의 제2대 교주(校主)가 되었다.

당시 일제의 한국통감부는 학부를 통하여 보성전문학교를 일제 산하로 관립화 또는 예속화하려고 하였다. 이를 위해 통감부는 학교 경비의 부족액을 기부하겠다는 회유책을 폈었다. 이종호는 이를 단호하게 거절하였다. 그 뒤로도 통감부의 지속적인 권유와 위협이 계속되었다. 하지만 이종호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자 통감부는 안중근사건연루혐의라는 죄목으로 이종호를 안창호, 이갑 등과 함께 붙잡기도 하였다.

1907년 1월에는 이준(열사), 이동휘 등 함경도의 유지들과 함께 한북흥학회를 조직하였으며, 이어 이 학회에 속성사범과를 설치하여 소학교 교원을 양성하였다.

1908년에 한북흥학회가 서우학회와 합동하여 서북학회로 개칭하면서 두 학회가 경영하던 학교도 통합되어 서북협성학교로 새출발을 하게 되었는데, 이종호가 교장으로 취임하였다.

그 밖에도 강화 보창학교와 청주 보성학교 등을 사재로 경영하고, 안창호를 도와서 평양 대성학교의 설립에도 기여하였다. 또한, 인쇄소 보성사[4]를 통하여 많은 서적과 교과서를 간행, 전국의 각 학교에 무료로 배부함으로써 근대교육의 보급에 이바지하였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보성전문을 비롯한 보성학교의 경영을 인수자인 천도교의 손병희에게 인계하였다.

1910년 12월 일제가 소위 ‘105인 사건’을 날조하여 독립운동가들을 체포하려 하자, 이종호는 1911년 이른 봄 이갑과 함께 중국 청도(靑島)로 망명하여 안창호·유동열 등과 독립운동 방책을 논의하였다. 한동안 중국에 머물다가 이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하였고, 이상설·김립·김도여 등과 함께 권업회를 조직하고,『권업신문』을 발행하여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또한 블라디보스토크의 한인 교육을 위하여 4개처에 한민학교(韓民學校) 등 학교를 설립하였다.

그 뒤 상하이로 갔다가 1917년 일본 경찰에 붙잡혀 귀국, 고향인 명천에서 1년간 거주제한을 받았다. 1918년에 상경하여 천도교에 이관된 보성학교 재단을 인수하려 하였으나, 일제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