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산학교
역사
7907년 12월 민족 교육을 위해 남강 이승훈이 평양북도 정주에 설립한 민족 학교이다.이승훈은 1864년 3월 25일 평안북도 정주에서 태어나서 상업 활동을 하던 사람이었다. 그는 1907년 7월 안창호의 연설을 듣고 깊은 감명을 받아 민족을 위한 교육과 산업의 발전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으며, 신민회도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서북 지방 최초의 사립 중학교였던 오산 학교는 창립 당시 7명의 학생과 2명의 교사으로 시작하였다. 학생들에게 수신, 역사, 지리, 수학, 물리, 법학통론, 헌법대의, 체조 등의 과목을 가르쳤다.
이승훈이 3⋅1 운동 당시 민족 대표의 일원으로 체포되자 오산 학교에 대한 탄압이 심해졌다. 오산중학교 학생들이 졸업생 및 주민들과 함께 만세운동을 벌이자 일제 당국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교사를 불태우고 폐교시켰으 당시 교장이던 조만식은 평양에서 구금되기까지 하였다. 어려움 속에서 운영되던 오산 학교는 1922년 이승훈이 출옥한 이후 오산 학교의 발전에 힘을 기울이면서 다시 안정을 찾았다. 오산 학교는 1926년 오산 고등보통학교로 승격되었다. 교과목은 수신·일본어·한문·국어·외국어·역사·지리·수학·작문·물리·화학·법제·경제·실업·도서·가창·체조 등이었고, 이를 각 학년에서 9∼10개 과목으로 나누어 가르쳤다.
1930년 5월에 이승훈의 교육을 받고 졸업한 학생들이 그의 민족교육을 기리기 위하여 학교 교정에 동상을 세웠다. 1주일 뒤에 이승훈은 협심증으로 운명하였는데, “유해를 생리표본으로 만들어 학생들을 위하여 쓰게 하라.”는 유명한 유언을 남겼다.
1934년에 화재로 본관이 전소되자 이의 재건을 위하여 당시 이사장으로 있던 김기홍과 교장 주기용(朱基瑢)이 헌신적으로 노력하고, 동아일보사를 비롯한 사회 각계의 후원과 협찬을 얻어 본관·대강당·과학관·체육관·수영장 등 근대식 교육시설을 신축할 수가 있었다. 1942년 일제는 민족의식을 말살하려고 교사와 학생 수백 명을 투옥시키고, 일본인 교장을 세워 학교를 운영하였으나 학생들은 이에 맞서 격렬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오산 학교는 광복 이후 남하하여 1953년 4월 부산에 재건하였다가, 같은 해에 서울시 용산구 원효로로 이전하였다. 1956년 4월 다시 서울시 용산구 보광동에 신교사를 건설하고 이전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1983년 2월 남녀공학으로 전환하였으나, 1990년 남녀공학을 폐지하고 남학교로 복귀하였다. 1991년 남강교육상을 제정해 제1회 남강교육상 시상식을 거행하였고, 1999년 남강기념관을 개관하였다. 2007년 개교 100주년 기념식을 거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