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채보상운동
국채보상운동
개요
1907년부터 1908년 사이에 국채를 국민들의 모금으로 갚기 위하여 전개된 국권회복운동이다.
신문 창간 당시에는 타블로이드판 6면으로 발행되었고, 한글본과 영문본을 함께 발행하였다.[1]
1904년 2월에 일어난 러일전쟁을 취재하기 위해 대한제국에 특파원으로 머무르던 어니스트 베델이 양기탁을 비롯하여 민족 진영 인사들에게 도움을 받아 1904년 7월 18일에 창간하였다. 이후 일제강점기시대에 대한매일신보는 매일신보로 이름이 바뀌었다.
창간 당시에는 화합을 추구한 대한제국, 일본, 러시아의 각 정부에서 재정을 지원했지만, 이후 일본의 국권 침탈에 반일 신문으로 전향하였다. 그 당시 일본이 사실상 언론의 검열을 맡았던 시기임에도 반발이 가능했던 것은 발행인 베델이 일본과 동맹국인 영국 국민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일본의 경제적 침략을 극복하기 위해 국채보상운동이 전국적으로 전개되었고, 대한매일신보 등 각종 신문이 적극 참여하였다.
하지만 통감부의 압박에 쇠퇴기를 겪는다. 민족 신문들의 저항을 탄압하기 위한 목적으로 통감부가 신문지법을 제정하고 이를 빌미로 베델을 1907년과 1908년 2번에 걸쳐 재판에 회부하였다. 또한 실질적인 경영주인 양기탁도 국채 보상 성금의 횡령 혐의로 재판에 넘겼다.[2]
대한매일신보와의 연관성
활동시기
연도 | 활동 | 설명 |
---|---|---|
1904.07.18 | 대한매일신보가 창간된 날 | 1904년에 발발한 러일전쟁을 취재하기 위해 영국인 어니스트 베델과 양기탁이 민족 진영 인사들에게 도움을 받아서 만든 민족적인 신문 |
1906.02 | 통감부 설립된 연도 | 일본 제국주의가 대한제국 황실의 안녕과 평화를 유지한다는 명분으로 서울에 설치한 통치기구로, 약 4년 6개월 동안 한국의 국정 전반을 장악했던 식민 통치 준비기국 |
1907.02 | 국채보상운동이 시작된 날 | 일본 제국이 대한제국을 경제적으로 예속시키고자 제공한 차관 1300만원을 국민들이 갚고자 한 것으로, 이와 관련된 기사를 대한매일신보에서 다루었으며 항일운동을 지속 |
결과
역사적 의의
국채보상운동은 처음부터 순수한 애국 충정에서 각지에서 자발적으로 일어난 것으로서, 전국적인 통일된 지휘체계 하에서 진행된 것이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일제의 방해ㆍ탄압 책동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하고 끝내 좌절되었던 것이다. 운동이 비록 좌절로 끝나긴 하였으나 국권 회복을 위한 투쟁의 하나로서 그 역사적 의의는 큰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