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민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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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밤 (토론 | 기여)님의 2023년 12월 7일 (목) 00:16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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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립

1907년 안창호의 발기로 양기탁, 전덕기, 이동휘, 이동녕, 이갑, 유동열, 안창호 등 7인이 창건위원이 되었다. 전체적으로 노백린, 이승훈, 안태국, 최광옥, 이시영, 이화영, 이상재, 윤치호, 이강, 조성환, 김구, 신채호, 박은식, 임치정, 이종호, 주진수 등이 중심이 되었다.

안창호대한매일신보 주필 양기탁을 방문하고 신민회 창립을 제의하였다. 안창호는 신민회를 비밀결사로 창립하자고 제안했고, 양기탁은 처음에 공개 단체로 창립하기를 희망하였다.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아 즉각 창립에 들어가지 못했다가, 결국 양기탁이 비밀결사 조직에 동의하여 창립이 추진되었다.

양기탁은 당시 ≪대한매일신보≫ 주필과 국채보상기성회의 총무로서 국권회복을 위한 애국계몽운동의 유력한 지도자였다. 때문에 국내의 애국 인사들과 긴밀하게 유대 관계를 지속하고 있었고, 민중들로부터도 큰 존경을 받고 있었다.

반면에 당시의 안창호는 비록 개인적인 역량은 뛰어날 수 있어도 그 동안 성장한 국내의 애국계몽운동 세력 안에 자기의 기반을 가지고 있지 못하였다. 이 때문에 안창호는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 때의 동지인 양기탁을 중심으로 하여 1907년 4월 초 신민회를 창립한 것이다.

최초의 부서는 당수에 해당하는 총감독을 양기탁이 맡고, 총서기에 이동녕, 재무는 전덕기, 집행원은 안창호가 담당했다. 다른 창건위원들은 각 도의 총감을 맡았다. 안창호가 맡은 집행원의 직책은 국내 동지들이 추천한 신입회원의 자격 심사를 담당하는 것으로서, 최근의 용어로 표현하면 조직부장과 같다.

신민회 창립 후 창건위원들은 즉각 자기의 영향력 안에 있는 인사들을 신민회에 가입시켜, 1910년경 회원수는 약 800명에 달하였다. 이는 당시의 영향력 있는 애국계몽운동가들을 거의 모두 망라한 숫자였다. 비밀결사로서의 신민회는 한말의 지도적 인사들이 거의 모두 회원이 됨으로써, 전국적 규모의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애국계몽운동 단체가 되었다.

대한신민회통용장정

제2장 제1절에는 신민회의 목적이 담겨 있다.

1. 궁극적 목적은 국권을 회복하여 자유 독립국을 세우고, 그 정치 체제는 공화정체(共和政體)로 하는 것이다.

비밀결사

활동

교육구국운동

민족산업진흥운동

청년활동

무관학교설립운동

105인 사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