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세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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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아지주세요 (토론 | 기여)님의 2023년 12월 5일 (화) 15:39 판 (연세대학교의 특별한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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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학교 기본 소개

연세대학교(延世大學校, YONSEI UNIVERSITY)는 학교법인 연세대학교 산하의 4년제 사립 종합대학이다. 개신교 산하 미션스쿨로,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교훈을 바탕으로 진리와 자유의 정신을 체득한 지도자를 양성한다는 건학 정신을 가지고 있다.

연세대학교에는 연세대를 상징하는 다양한 상징들이 존재한다. 그 중 대표적으로 연세대학교의 상징 동물인 독수리, 상징색인 로얄블루 등이 있다.

독수리
로얄블루

연세대학교 역사 소개

연희전문학교 개교

1885년 조선에 들어온 선교사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는 조선에서 개신교 선교활동을 하면서 그와 동시에 한국 교육발전에 힘써왔다. 선교사로 파견되기 위해 의학 교육을 받았던 언더우드는 1885년 설립된 제중원에서 병원 운영에 지속적으로 관여했고, 1886년 제중원에서 의학 교육이 시작되자 영어와 물리, 화학 등의 당시 조선에서는 배울 수 없었던 과목을 가르치기도 했다. 이후, 기존 제중원의 고위 간부들의 갑작스러운 부재로 제중원이 위기에 빠졌을 때, 언더우드는 제중원의 유지에 크게 도움을 주었고, 1890년대 초 미국 선교부가 비용이 많이 든다는 이유로 제중원을 포기하려 했을 때, 조선의 수도인 서울에서 제중원이 갖는 이점을 들며 제중원을 유지하도록 설득하는 등 연희전문학교의 출발인 제중원을 유지하는데 매우 힘썼다. 또 제중원이 정부로부터 떨어져 나와 사립으로 독립할 때 언더우드가 미국 재단으로부터 지원금을 받아온 것 역시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 뿐만 아니라 언더우드는 한국에서 선교활동을 하면서 한국인 교육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1885년 고아원을 겸한 교육기관인 경신학당을 설립해, 연희전문학교가 처음으로 경신학교 대학부로 설립되게했다. 비록 대학으로서 연희전문학교의 직접적인 시작은 1915년 3월이었지만, 이화여대, 숭실대, 배재대 등의 예에서 볼때, 연희전문학교 및 연세대학교의 설립도 중등교육기관으로서의 경신학당이 설립된 1885년으로 설정하게 되었다. 일제 시대에는 연희전문학교 개교 연도를 1914년으로 표기하기도 했다. 하지만 허가 등 절차상 문제로 1915년을 개교 연도로 확정했다. 하지만 여전히 문제가 남았는데 미국 선교회 본부로부터 아직 승인을 받기 이전이었다는 점이다. 개강한 후 1914년 4월말 뉴욕 선교회 본부에서 본격적으로 이 문제가 다뤄졌다. 하지만 평양 측의 격렬한 반대 때문에 논의가 계속 지체되었다. 6월 뉴욕에서 서울안 지지로 의견이 모아졌지만, 평양파의 강력한 반발이 있었기 때문에 뉴욕 선교본부가 공식 승인이 지연되었다. 마펫을 필두로 한 평양 측은 언더우드와 에비슨의 퇴임과 한반도에서 축출을 주장하기까지 했다. 실제로 마펫의 맹공으로 언더우드는 선교회 탈퇴까지 고려할 정도로 힘든 시간을 보내었다. 결국 1914년 12월에야 미 선교본부는 서울 연합 대학 설립을 공식 승인했다. 서울에 정식으로 대학을 설립하는 것이 결정되면서 숭실학교 대학부는 초급대학으로 유지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1915년 초 선교부는 한국기독교대학 현지이사회를 공식적으로 조직했다.

연희전문학교

언더우드와 선교부 서울지부는 1915년 4월 12일 '조선기독교대학'을 공식 개교하였다. 경신학교를 중심으로 서울에 있던 다른 개신교계 학교인 배재학교, 숭실학교의 연합 대학부 형태였다. 사실 조선기독교대학이라는 명칭은 미국 선교본부 보고서에 작성되는 대외적인 영문 명칭이었고, 국내에서는 '경신학교 대학부'라는 이름으로 개교했다. 교장은 해당 학교 설립에 큰 공헌을 한 언더우드였고, 설립 당시부터 4년제 정규대학을 표방하여 미국식 대학 시스템을 도입했다. 개교 당시 학과는 문과, 수물과, 상과, 농과, 신과 5과를 두었다. 문이과 및 순수학문과 실용학문 등 그 과가 다양했고 미국 기독교 재단의 지원으로 설립된 만큼 신학과도 설치하였다. 당시 보성법률상업학교(보성전문학교)가 법과와 상과의 문과 계열 실용학과 2개로 구성된 것과 대비되는 모습이다. 개교 당시 첫 학생은 61명이었다. 개교 이후 일제에 제출한 대학 설립 신청서 및 1915년 연말 선교부 보고서 등에 따르면 연희전문학교는 이후 의학과(세브란스의학교와의 통합을 전제), 전기공학과, 건축과 등을 개설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으나 총독부의 불허 등으로 실현되지는 못했다. 당시 선교부 일각에서는 신학교 중심의 학교 설립을 주장하기도 했지만, 언더우드, 에비슨, 베커 등은 이에 반대하고 철저히 미국식 4년제 대학을 따른 정규 대학을 만들 것을 구상하였다. 신학과를 만들어 기독교 교육을 하되, 다른 전공들은 기독교 이념과 관련 없이 학문의 자율성을 보장하도록 하였다. 설립되는 대학은 선교의 직접적인 도구로 사용되어서는 안되고, 대학을 통해 한국인들에게 고등교육의 기회를 제공하면서 자연스레 기독교가 받아들여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때마침 설립 당시 이전까지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미 북장로교 측이 평양 숭실대학 측의 반대로 인해 연희 설립에서 한발 빼게 되었고, 이때 오히려 감리교가 나서서 연희 설립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이로 인해 연희전문학교는 장로교라는 특정 교파가 주도하는 것이 아닌 감리교를 포함한 여러 교단이 연합하여 운영하는 기독교 재단으로 설립되었고, 이러한 배경은 연희전문학교가 종교 재단으로부터 지원은 받지만 재단의 입김에서 상당히 자유로운 대학 공동체로 발전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연희 설립 초기에 많은 도움을 준 감리교의 영향은 아펜젤러관, 핀슨관 등 연희전문학교 초기 캠퍼스의 상당수에서 감리교 측을 기념하는 것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언더우드와 에비슨 및 선교부는 4년제 정규대학 설립을 목표로 하였고, 개교와 동시에 조선기독교대학은 총독부가 정한 기준을 상당히 충족하고 있음을 주장하며 총독부에 '대학' 인가 지원서를 제출했다. 당시 지원서에는 세브란스의학교와의 통합을 전제로 의과를 포함한 4~6년제 종합대학 안이 드러나 있다. 그러나 일제는 한국에 대학령이 없다는 이유로 그 설립을 불허했고, 전문학교 허가마저 여러가지 트집을 잡으며 지연하고 있었다. 앞서 언급된 종교 교육 문제 및 교원들의 일본어 구사 문제에 더해 총독부는 교육 과정을 3년제로 축소하고 과학 관련 전공을 폐과하도록 압력을 넣었다. 이에 선교사들은 결사적으로 반발했다. 천신만고 끝에 1917년 4월 17일 400명 정원의 4년제 ‘사립연희전문학교’로 설립을 인가받았다. 전문학교 허가를 내주지 않으려고 했던 일제를 설득하여 결국 인가를 받아낸 데에는 에비슨의 노력과 능력이 크게 작용했다고 한다.

연희대학교

1945년 8월 해방과 함께 미군정이 실시되자 9월 ‘연희전문학교 접수위원회’가 조직(접수위원 백낙준, 유억겸, 이춘호, 김윤경, 이묘묵, 조의설, 김성권)되어 미군정청으로부터 경성공업경영전문학교의 재산과 운영권을 인수받아 연희전문학교로 교명을 회복하고 정식으로 재개교하였다. 1945년 10월 유억겸 교수가 5대 교장으로 취임했으며, 1945년 12월 18일 백낙준 박사가 6대 교장에 취임하였다. 일제시대 때 강제로 교직을 떠났던 국내외 여러 교수들이 다시 합류했다. 계속 국내에 머물렀던 한국인 교수들 뿐만 아니라 태평양 전쟁 발발 이후 일제에 의해 강제로 교직에서 물러나 미국으로 귀국해야 했던 미국인 교수들 가운데서 베커, 빌링스, 원일한 교수 등이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학교의 재건을 도왔다. 당시 연희 교수진들 중에서는 외국인 교수들 뿐만 아니라 백낙준 등 미국 유학파들이 상당수 있었고, 일제 시대부터 연희전문은 영어 수업이 많았기 때문에 연희전문 출신 동문들은 영어에 능통한 경우가 많아 미군정청에서 요직을 겸하는 경우도 많았다. 이들은 연희전문이 종합대학교로 승격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연세대학교

이미 1912년 연희전문학교 설립을 준비하던 당시 미국 선교회 본부는 연희전문학교와 세브란스연합의학교의 통합을 고려했다. 하지만 일제의 허가 및 운영 등 여러 현실적인 이유로 일단 각각 따로 운영하기로 결정했다. 결국 1915년 세브란스의학교와 별도의 재단으로 연희전문학교가 개교했다. 하지만 연희전문학교 개교 이후에도 꾸준히 선교부에서는 두 학교의 통합을 계획했다두 학교의 통합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 하지만 1920년대 일제의 민립대학 설치 억제 정책에 의해 결국 성취되지 못했다.특히 양교 통합 작업은 1919년 3.1 운동으로 큰 타격을 입었다. 당시 많은 학생들이 운동에 가담했던 연희전문학교는 상당수의 학생들이 학교를 떠나는 참사를 겪었고, 학교는 휴교해야 했다. 3.1운동이 일어나기 불과 며칠 전에 1회 졸업생을 배출했던 연희전문학교는 이로인해 큰 타격을 입었고 이후 학교가 정상화되기까지 약 2~3년의 세월이 걸렸다. 3.1 운동 후 일제의 유화적인 문화통치가 펼쳐지자 종합대학교 승격을 목표로 양교의 통합이 재추진했다. 그러나 일제는 1924년 경성제국대학 하나만으로 조선의 대학을 축소시켜버렸다. 하지만 오히려, 경성제대가 세워지자, 연희전문학교 및 세브란스 의전 양교 통합에 관한 내부 조율이 빠르게 진척되어 1926년 3월 에비슨의 주도로 연희전문학교 및 세브란스 의전 이사 및 교수진간에 양교 합동안이 합의되었고 미 선교회 본부로부터도 승인을 받았다. 그러나 일제의 간섭 및 제지로 성취되지 못하다가 결국 1955년 3월 23일 연희대학교와 세브란스의대의 양교합동이 최종 결정되었다.

연세대학교의 특별한 문화

RC 프로그램

연세대학교에 입학한 1학년 학생들은 Residential College 프로그램으로 연세대학교국제캠퍼스에서 1년간 같이 생활한다. RC는 학생들에게 단순한 거주공간인 Residence를 생활체험 교육의 공간으로 전환하여 신입생들이 주간의 정규 수업과 방과 후 공동체 활동을 통해 다양한 경험을 하며 새로운 대학생활에 순조롭게 적응하고 미래의 지도자가 될 자질을 키울 수 있는 세계 명문형 교육프로그램이라고 한다. 2014학년도부터 1학년 RC대상자의 신촌캠퍼스 과목 수강이 금지되었고, 2학년이 되면 비로소 신촌/국제캠퍼스에서 열리는 모든 과목을 수강할 수 있다. 동아리, 학생 자치 활동 및 큰 행사들은 신촌과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학생 교류에 있어서는 단절되어 있지 않다. 점차 신촌캠퍼스의 인원이 국제캠퍼스 출신으로 채워지면 양 캠퍼스를 함께 이용하는 분위기가 자리를 잡을 것으로 기대된다. 송도에서만 열리는 필수 RC 과목을 P/NP를 받거나 수강을 못하게 되면 2학년 이후에도 송도에서 해당 과목들을 반드시 수강하여야만 졸업이 가능하다. 이를 위해 송도로 돌아와 수업을 듣는 것을 '리송(re-송)'이라 한다. 이때 송도 과목을 얼마냐 듣냐에 따라서 그냥 송도를 통학하는 사람이 있고, 아예 NON-RC로 송도 기숙사에 돌아오는 경우도 있다. 참고로 몇몇 학생들은 1학기에는 5월, 2학기에는 10월에 12점을 다 채우고 나머지 때 열심히 공부한다. 강제로 학생들을 한 곳에 모아놓고 기숙사 생활을 강요하는 만큼 이에 대해 불편해하는 목소리도 있다. 앞서 언급했듯이 RC 과목 이수에 실패하면 나중에 다시 송도에 돌아와야만 한다. 그리고 국캠으로 통학이 가능한 거리에 거주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인천시에 거주하지 않는다면 모두 강제로 입사해야만 한다. 게다가 기숙사에서도 2~3인실을 사용해야만 하고 공용 공간에서 겪는 남들에게서의 민폐가 스트레스이기도 하다. 그래도 대체적으로 국제캠퍼스에서 RC 교육을 이수한 학생들은 송도에서의 생활을 만족해하는 경우가 많은 편이다. 굉장히 가까운 거리에 있는 강의실들로 인해 시간 활용도 수월하고 공강 시간을 걱정할 필요도 없다. 시험 기간에도 기숙사, 도서관, 열람실, 카페 등 원하는 곳에서 준비도 가능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좋은 점은 친구들이 항상 곁에 있다는 것으로, 언제나 동기들과 가까운 거리에서 자유롭게 시간을 보낼 수 있고 친분을 쌓을 기회도 많아진다.

국제캠









응원문화

연세대학교 학생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꼭 해보았을 연세대학교의 응원. 이를 이끄는 연세대학교 응원단은 반세기 이상의 자체 역사를 갖고 있는 학내 공식 특별자치단체이다. 지난 1956년 첫 연고전 개최와 함께 탄생한 연세대학교 응원단은 연고전의 역사와 그 맥을 같이 하고 있다. 단장 1인체제로 출발한 응원단은 1970년대 이래 정단원과 수습단원으로 이루어진 현재의 조직적인 모습으로 발전해 나가기 시작했다. 현재 연세대학교 응원단은 새내기 응원오티, 합동응원전, 아카라카를 온누리에, 연고전을 포함한 주요 응원 행사를 주관하며 연세인의 응원 문화를 이끌어가고 있다.

연세대 응원단









채플

채플은 기독교 대학의 중심 기능으로서 진리와 자유의 기독교적 정신과 삶을 가르친다. 정신적 도장으로서 채플은 모든 연세인들, 즉 학부생과 대학원생, 교직원을 하나의 공동체로 묶는다. 채플은 기독교 성직자뿐만 아니라 건학이념의 배경이 되는 성서와 기독교 분야 전문가와 사회 각 영역에서 이를 모범적으로 구현하는 삶을 산 교내외 강사들을 초빙하며, 이들의 말씀과 증언을 통해 신앙적으로 무장되고 인격적으로 성숙한 연세인을 양성한다. 현재 교목실이 운영하고 있는 채플의 종류로는 일반채플과 예배채플이 있다. 일반채플은 초빙 강연자가 특정한 주제에 대해 말씀을 전하는 방식으로 진행한다. 이곳에서 강연자는 기독교적 가치관과 세계관 아래 살아온 삶의 여정을 일 또는 학문 세계와 연계하여 학생들에게 증언한다. 더 나아가 일반채플에서는 다양한 예술 형태를 기독교와 접목한 공연채플과 특별한 연세동문을 초청하여 함께 대화를 나누고 조언을 얻는 대화채플도 주기적으로 구성하여 실시한다. 예배채플은 특별히 교회 예배 분위기에 익숙한 기독교인들을 위한 분반으로, 전형적인 개신교 예배의 형식을 차용하여 운영한다.모든 학부생은 졸업하기 전 4개 학기 이상 채플에 의무적으로 참여해야한다. 신촌캠퍼스는 화요일과 수요일 2, 3교시에 모든 학과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일반채플을, 수요일 5교시는 UIC 학생들을 주 대상으로 한 영어채플을 진행한다. 국제캠퍼스에서는 2014년도 2학기부터 화요일 2, 3교시는 영어채플로, 수요일 2, 3교시는 찬양채플로, 목요일 2, 3교시는 일반채플로 구분해서 진행한다.

채플

연세대학교 캠퍼스

연세대학교 신촌캠퍼스는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신촌동에 위치해있습니다. 면적은 약 990,000m2이며, 하늘에서 바라본 형상은 마름모꼴입니다. 서울의 손꼽히는 부도심인 신촌에 인접하고 있으며, 본관인 언더우드관을 비롯한 학교의 초창기에 지어진 건물들은 잘 보존되어 사적으로 지정되었으며, 여러 단과대학, 연구시설 등과 중앙도서관, 의료원, 학생회관, 기숙사 등이 캠퍼스의 핵심 건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