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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ᴗ• (토론 | 기여)님의 2023년 12월 4일 (월) 22:24 판 (3.15 의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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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항쟁.l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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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텐츠 구조

클래스(Class)

클래스 설명 노드
주제
대표 키워드인 민주항쟁을 주제로서 나타내었다
만주항쟁
항쟁
민주화운동 시기 발생했던 주요 운동들을 ‘항쟁’이라는 키워드로 분류하였다.
4.19혁명, 부마항쟁, 5.18 민주화운동, 6월민주항쟁
사건
항쟁의 원인, 결과가 되는 사건을 정리하였다
3.15부정선거, 고려대 4.18학생시위, 3.15의거, YH사건, 10.26사태, 12.12 군사반란, 비상계엄령, 박종철 고문치사사건, 고문추방민족대행진, 4.13호헌조치, 6.29선언, 대통령직선제
지역
주요 항쟁들이 일어났던 지역을 정리하였다
마산, 부산, 광주
인물
주요사건들을 발생시킨 인물, 참여했던 인물을 묶어서 정리하였다
이승만, 이기붕, 김주열, 박정희, 김재규, 전두환, 신군부, 시민군, 박종철, 이한열, 노태우

관계성(Relation)

  • ~은 ~에 속한다
    • 설명: 주요 항쟁들이 민주항쟁에 속함을 나타내거나 인물의 소속을 나타낸다.
      • 해당노드:
        1. 4.19혁명 -> 민주항쟁
        2. 부마항쟁 -> 민주항쟁
        3. 5.18민주화운동 -> 민주항쟁
        4. 6월 민주항쟁 -> 민주항쟁
        5. 전두환 -> 신군부
  • ~은 ~의 원인이다
    • 설명: 어떠한 사건과 인과관계를 이루는 또다른 사건 혹은 인물을 설명한다.
        1. 이기붕 -> 3.15부정선거
        2. 김주열 -> 고려대 4.18학생시위
        3. 고려대 4.18학생시위 -> 4.19혁명
        4. 3.15의거 -> 4.19혁명
        5. 김주열 -> 4.19혁명
        6. 3.15부정선거 -> 3.15의거
        7. YH사건 -> 부마항쟁
        8. 부마항쟁 -> 10.26사태
        9. 박정희 -> 10.26사태
        10. 비상계엄령 -> 5.18민주화운동
        11. 박종철 고문 치사사건 -> 고문추방민족대행진
        12. 고문추방민족대행진 -> 4.13호헌조치
        13. 4.13호헌조치 -> 6월민주항쟁
        14. 6월민주항쟁 -> 6.29선언
        15. 6월민주항쟁 -> 대통령직선제
  • ~은 ~을 발생시켰다
    • 설명: 사건과 그 사건을 직접적으로 발생시킨 인물을 연결한다.
        1. 이승만 -> 3.15부정선거
        2. 김재규 -> 10.26사태
        3. 신군부 -> 1212군사반란
        4. 전두환 -> 비상계엄령
        5. 노태우 -> 6.29선언
        6. 시민군 -> 5.18민주화운동
  • ~은 ~에 희생되었다
    • 설명: 민주항쟁의 진압과정 등 에서 희생된 인물을 설명한다
        1. 김주열 -> 3.15의거
        2. 이한열 -> 6월 민주항쟁
        3. 박종철>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 ~은 ~에서 발생했다
    • 설명: 사건이 일어난 장소를 설명한다.
        1. 3.15의거 -> 마산
        2. 부마항쟁 -> 부산
        3. 부마항쟁 -> 마산
        4. 5.18민주화운동 -> 광주

기여

4.19혁명

타임라인

원인

3.15 부정선거

3월 15일 투표당시모습
사진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1959년 대한민국은 제 4대 대통령 선거와 제 5대 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있었다. 당시 자유당에서는 12년째 대통령으로서 연임 중이던 이승만을 대통령 후보로, 이기붕을 부통령 후보로 선임하였다. 그러나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였던 조병옥이 병세의 악화로 사망하게 되고, 이승만의 대통령 당선은 확실시되었다. 이에 따라 선거의 초점은 자유당의 조병옥과 민주당의 장면 간의 선거전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본격적인 선거유세의 시작과 함께 정부와 여당의 잇따른 야당선거운동 방해사건으로 부정선거가 시작되었다. 1960년 3월 15일 선거가 시작된 이후에도 다양한 방법의 부정행위가 일어났고, 개표 결과 이승만과 이기붕의 득표가 100%에 육박하는 결과로 나오자 자유당은 득표수를 하향 조정해 최종 집계에 반영할 것을 지시했다. 결국 이승만 88.7%, 이기붕 79%의 득표율을 가지며 정, 부통령에 당선되었다.[1]

전개

3.15 의거

이승만 자유당 정권의 3.15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대규모 시위가 3월 15일 당일 마산에서 일어났는데, 이를 이승만 정권의 부정한 선거 행위에 대항해 의로운 거사를 행했다는 의미로 3.15 의거 혹은 3.15 마산 의거라고 부른다. 3.15 의거는 전국적인 시위로 확대되면서, 4.19 혁명으로 이어졌고 결국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 선언을 이끌어냈다.

의의

부마항쟁

타임라인

원인

전개

의의

5.18민주화운동

타임라인

원인

유신체제의 붕괴

암살 당시 상황을 재현하는 김재규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았다. - 김재규

대통령 박정희(朴正熙)의 장기간 군사독재가 통치능력을 상실한 일련의 사태는 1979년 10월 이후 연속적으로 발생하였다. 10월 4일 신민당 총재 김영삼이 국회에서 의원직을 제명당하자 10월 15부터 10월 20까지 부산 · 마산 등지에서는 부마항쟁이 일어났고, 이의 해결을 둘러싼 노선대립으로 갈등 중 10월 26일 김재규가 박정희를 살해하였다.

10.26 사태의 사후 수습과정에서 보안사령관 전두환 소장을 중심으로 신군부 세력이 부상하였으며, 이들은 12.12 사건의 하극상을 통하여 군부를 장악하였다. 1980년 2월 29일 김대중 등이 복권되었으나 그 해 봄, 신군부는 최규하 과도 정부를 유명무실하게 하고 국민들이 요구하는 민주주의와 이를 위한 명확한 정치일정 제시를 거부하면서 권력기반을 구축하였다.

YH 무역회사 여성 노동자 농성과 야당 탄압

한 시대의 대격변을 예고하는 단초는 여성노동자들의 투쟁에서 시작됐다. 1979년 8월 9일 오전, 신민당의 당사 4층 강당에서는 봉제업체인 YH무역주식회사의 여성노동자 200여명이 기업주의 폐업에 반발하여 폐업조치 철회 농성을 벌였다. 노동자의 정당한 권리인 단체행동권을 보장하기 위해 신민당이 당사 건물을 내준 것이다. 그러나 유신정권은 상식을 초월하는 엄청난 폭력을 동원하여 농성을 해산시켰다. 이 사건은 독재정권에 의한 노동 탄압 사건을 넘어선 야당에 대한 정치 탄압 사건으로 발전하였다. ]] 이날 경찰은 1000여명의 진압대원을 신민당사로 난입시켜 농성을 하고 있던 174명의 여성 노동자들을 강제로 밖으로 끌어냈다. 이 과정에서 노동조합 간부인 김경숙 씨가 창문으로 뛰어내려 중태에 빠졌고 결국 병원에서 숨을 거두었다. 또한 경찰은 총재실 문을 부수고 들어가 김영삼 총재와 당 간부들을 끌어내면서 무자비한 폭력을 휘두르기도 하였다.

박정희 정권은 이 노동자 농성 사건을 빌미로 신민당 분열공작을 시도하였다. 유신정권과 비밀리에 결탁한 신민당 원외지구당 위원장 3명이 ‘신민당 김영삼 총재와 부총재 전원의 직무집행정지 가처분 신청’을 법원에 접수시켰다. 그리고 법원은 가처분 신청을 받아들여 신민당 총재단의 직무 집행을 정지시키고 박정희 정권의 꼭두각시에 지나지 않는 인물을 총재직무대행으로 선임하는 결정을 내렸다. 당원들이 뽑은 대표를 사법부가 독재정권이 내세운 인물로 강제로 바꿔버린 것이다.

아울러 박정희 정권은 김대중의 동교동 자택을 전면 봉쇄하였고, 미국의 지미 카터 행정부에게 박정희 정권에 대한 지원을 끊으라고 요구한 김영삼 총재의 『뉴욕타임즈』 회견내용을 “반헌정적, 반민족적 작태”로 몰아서 국회에 징계 동의안을 제출했다. 10월 4일 오후 공화당과 유신정우회 의원 159명은 여당 총회장에서 김영삼 신민당 총재에 대한 제명 결의안을 기습적으로 처리해 버렸다.

노사분규 사태로 시작된 사건이 제1야당 당수의 의원직 제명으로 확대된 일련의 비정상적 정치적 사태를 지켜본 국민들 사이에서는 유신체제에 대한 불신과 혐오감이 극도로 고조되었다. 또한 이 사건은 그 동안 다소 주춤하던 대학가에 반유신 반독재 운동의 열기가 다시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다.

청춘을 바쳐, 학생 운동

1980년 5월 15일 서울역 앞에 모인 시위대

군부의 재집권 야욕에 대한 국민적 저항은 학생운동을 중심으로 다양하게 표출되었다. 1980년 3월, 서울대 총학생회 출범을 시작으로 4월 초순에는 전국의 주요 대학들이 총학생회를 결성하기 시작하였다. 대학별로 독재 정권에 아부했던 어용교수와 족벌사학 퇴진 운동을 벌였고, 특히 병영집체훈련 거부가 주요 이슈로 전면 등장했다. 대학 신입생들은 의무적으로 군부대에 10일 간 입대하여 각종 군사훈련을 이수해야 했는데, 총학생회가 이 훈련을 반대하는 운동을 전개한 것이다. 각 대학의 병영집체훈련 거부운동이 본격화되고 전국적인 쟁점으로 떠오르자 신군부는 신문, 방송을 통해 ‘학생들의 안보의식 결여’를 비난하고 교내 시위·농성을 집중적으로 보도하게 했다. 5월 1일에 서울대가 입영훈련 거부투쟁 철회를 결정하고 ‘계엄령 해제’와 ‘유신잔당 퇴진’, ‘정부개헌중단’과 ‘노동 3권 보장’ 등을 요구하기 시작하면서 대학가는 이제까지의 학내 문제 중심의 운동에서 정치개혁을 위한 투쟁으로 방향을 전환하기 시작하였다. 그간 정부와 대학 간에 팽팽하게 유지되던 긴장 관계는 폭발 직전으로 내닫게 된 것이다.

약 열흘 간의 대정부 투쟁을 준비한 대학가는 5월 10일 고려대 총학생회장실에서 열린 ‘총학생회장단 회의’에 참석한 전국 23개 대학 대표들은 ‘비상계엄의 즉각 해제’와 ‘전두환, 신현확 등 유신잔당 퇴진’ 등을 결의하고 성명서를 발표하는 등 정세에 대한 공동대처 방안을 마련했다. 이후 5월 13일부터 5월 14일에 걸쳐 서울 · 부산 · 대구 · 광주 등 37개 대학에서 계엄철폐를 요구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5월 15일에는 서울역에서 시위가 발생하는 등 학생시위는 서울시가지를 거의 마비시키는 등 야간까지 지속되어 사태가 절정에 달하면서 신군부 세력을 위협하였다. 5월 16일 24개 대학 학생대표들은 당분간 시국의 추이를 관망하기로 결정하고 가두시위를 중단하면서 소강상태에 돌입하는 듯하였다.

1980년 봄의 광주

5월 17일 신군부 세력이 이전까지는 제주도를 제외한 지역에 한정되었던 비상계엄을 전국에 확대하는 조치인 계엄포고 10호(17일 24시에 발효: 각 대학 휴교령 포함)를 밤 9시 40분에 의결하고 밤 11시 40분에 발표하면서 밤 11시를 전후한 시점부터 김대중 · 김종필이 연행되는 등 권력형 부정축재자 및 소요조종 혐의자, 학생 시위 주동자가 체포되었다. 이날 밤 광주지역의 사회운동·학생운동의 지도자도 상당수가 검거되었다. 광주의 검거대상자는 전남대 12명, 조선대 10명 등 총 22명이었다. 전남에서 계엄합동수사단은 광주505보안대가 중심이고, 중앙정보부, 경찰 등이 보조역할을 했다. 전남 계엄합동수사단은 22대 차량과 86명의 인원이 출동해 정동년 등 복적생들과 대학의 총학생회 간부들을 집중 검거했다.

한편 육군본부는 14일 오전 7시55분에 국가 중요 보안목표와 주요대학에 군 병력 배치 명령을 하달했다. 이 명령에 따라 전남북계엄분소장인 윤흥정 전교사령관은 광주 시내 주요 시설물에 이날 오후부터 계엄병력을 배치했다. 31사단 96연대 병력이 광주시내 KBS건물에 42명, MBC 21명, CBS 11명, VOC(전일방송) 11명 등 주요 방송사 건물에 배치돼 경비에 들어간 것이다.

이날 오후 윤흥정 전교사령관은 정웅 31사단장, 신우식 7공수여단장이 머리를 맞대고 7공수여단의 광주배치에 따른 수송수단 지원도 미리 협의했다. 그리고 5월 8일부터 16일 사이에 공수부대 수뇌부들도 헬기를 타고 서울에서 내려와 광주 상무대의 전교사(전투병과교육사령부)를 방문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광주에서 시위가 격화되면 즉각적으로 최정예 군부대를 동원해서 진압할 준비를 철저하게 갖추고 있었다. 5월 18일에 시작된 광주의 비극은 그 이전에 이미 시한폭탄처럼 준비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전개


금남로 앞에 집결한 버스와 시민군


휴교령이 내려질 경우 교문 앞에서 집결한다는 결의에 따라 학생들은 5월 18일 오전 전남대학교 앞에 모였다. 공수부대원들이 전남대 앞 시위를 저지하자 대학생들은 광주역에 재집결해서 시위를 이어갔다. 시위대가 점차 늘어나면서 공수부대원이 시내에서 시위진압에 나섰으며 18일 오후 1시부터 무차별 진압작전이 이루어져 부상자가 속출하였다.

군인들이 금남로 등 시내 중심가에서 학생으로 보이는 청년이나 여자를 마구 구타하고 짓밟으며 찌르는 등의 잔혹 행동을 하자 시민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이에 시위대는 오후 4시 이후 파출소 파괴 등 적극공세에 나섰다. 계엄군의 과잉 무력진압은 시위를 해산시키는 데는 성공하였으나 오히려 시민들을 단결시켰으며, 결국 19일 시민 · 학생 연대가 발생하는 계기를 제공하였다.

19일 오전에는 일시적 소강상태였으나 오후 들어서 분노한 학생 · 시민들이 군 · 경찰과 공방전을 벌이면서 시위는 점차 격화되었다. 시민들은 공포감에서 벗어나 자신의 생존을 위해 적극적으로 가담하면서 단순한 학생시위에서 시민봉기라는 새로운 국면으로 전환되었다.

계엄군은 시위대를 포위하여 구타하였으며 일부 고등학생까지 포함된 시위대는 돌과 화염병으로 저항하였고 파출소와 방송국 등에 침입하였다. 뒤처진 공수부대를 공격하거나 고립된 차량을 포위하기도 하였으며 총과 방패를 빼앗기도 하였고, 오후 4시 50분 시민들에게 포위된 계엄군의 장갑차에서 최초의 발포가 있었다.

19일 밤비가 내리는 가운데 시위가 산발적으로 계속되었으며, 20일 오전 비가 그치고 대규모 시위는 별로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오후부터 다시 시작되었다. 20일 오후 6시부터 택시와 버스 운전 기사들이 광주역과 무등경기장에 모여 대형 버스와 트럭을 앞세우고 일시에 금남로에 집결하기 시작하였으며 이들을 앞세운 시위는 계엄군을 몰아내는 데 중요한 계기를 제공하였다.

의의

6월민주항쟁

타임라인

원인

전개

의의

  1. 자세한 내용은 3.15부정선거 페이지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