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로신화

dh_edu
조선 (토론 | 기여)님의 2022년 12월 12일 (월) 17:05 판
(차이) ← 이전 판 | 최신판 (차이) | 다음 판 → (차이)
이동: 둘러보기, 검색
구간과 6개의 알(우리 역사넷).jpeg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놓아라


김수로왕
김수로왕 표준영정.jpeg
인물 김수로왕
신상정보
이름 김수로
별호
원어 이름
국가 가야(금관가야)
재위 기간 A.D.44 ~ A.D.199(총 157년)
출생 A.D. 42
사망 A.D. 199
부친 알려진 바 없음.
모친 알려진 바 없음.
배우자 아유타국의 공주 허황옥

정의

금관가야의 시조이자 김해 김씨의 선조인 김수로왕에 관한 신화

  • 본 페이지는 김수로왕의 탄생 신화(1)와 결혼 설화(2),삼국유사에 수록된 석탈해와의 다툼 설화(3)를 모두 김수로신화로 보고 다루기로 한다.

김수로왕 일대기 타임라인

김수로왕 탄생신화

줄거리

"천지개벽 후에 아직 나라로 부르는 칭호가 없고 역시 임금이나 신하라고 부르는 칭호도 없었다.다만 아도간,여도간 등의 아홉 간이 있었고 이들이 추장이 되어 백성들을 통솔하였다. 호수는 1백 호에 7만 5천 명쯤 되었다. 후한 광무제 건무 18년 임인 3월 계욕날 이곳 북구지에서 무엇이 수상한 소리로 부르는 기척이 있었으므로 2~3백 명 되는 무리가 모였다. 사람 목소리 같은 소리가 말하기를 “거기 누가 있느냐?” 하였다. 아홉 간이 대답하기를 “우리가 있습니다.” 하니 그 목소리가 또 말하기를 “내가 있는 곳이 어데인고?” 하여 “구지외다.”라고 대답하였다.또 말하기를 “하느님이 나를 명령한 까닭은 이곳에 와서 나라를 새롭게 하고 임금이 되라고 하셨다. 그러기 위하여 여기 내려온 것이다. 너희는 모름지기 봉우리 꼭대기의 흙 한 줌씩을 쥐고 노래를 불러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밀어라/ 만약 아니 내놓으면/ 불에 구워 먹겠다'하면서 춤을 추면 이것이 대왕을 마중하여 즐겨 뛰노는 것으로 될 것이다.” 하였다. 아홉 간이 그 말대로 모두 즐겨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었다. 얼마 안 되어 쳐다보니 보랏빛 노끈이 하늘로부터 드리워 땅에 닿아 있었고 노끈 끝을 찾아보니 붉은 보자기로 싼 금합이 있었다. 합을 열어 보니, 둥글기가 해 같은 황금알 여섯 개가 있었다. 사람들이 모두 놀랍고도 기뻐서 함께 수없이 절을 하다가 조금 뒤에 다시 알을 싸 가지고 아도간의 집으로 돌아와 탁자 위에 두고는 각각 흩어졌다.그 후 열두 시간이 지난 다음 날, 날이 샐 무렵에 무리가 다시 모여 합을 열었더니 알 여섯 개가 사내아이로 화하였다. 10일 밤낮이 지나자 사내아이들이 모두 키가 9척이 되고 군주의 용모를 갖추었다. 가자 먼저 사람으로 변한 이가 왕위에 오르니 처음으로 나타났다 하여 '수로'라 하여 여섯 가야 중 하나를 맡고 남은 다섯 사람은 각각 돌아가 다섯 가야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분석 및 의의

전체 일대기

삼국사기의 『가락국기(駕洛國記)』에 따르면 수로왕의 탄생과 혼사, 그리고 즉위에서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내력을 줄거리로 삼고 있음.

시련 없는 등극과 다양한 부족의 결합

<주몽신화>,<석탈해신화>에서는 험난한 시련 끝에 왕위에 오르지만 등극 과정까지는 어떤 시련도 주어지지 않는다. 또한 왕이 정해지지 않고 9명의 족장이 다스리고 있었다는 언급을 통해 여러 부족 사회가 결합되어 형성된 가야를 짐작하게 한다.

구지가

위 신화에 삽입된 구지가는 현존하는 최고의 집단 무가라는 의의를 가진다. 김수로왕신화는 신이 직접 인간에게 하는 신탁을 인간들이 받들어 신화로 서술할 뿐 아니라 반복적인 어구로 표현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즉, 우리 신화의 기원은 굿과 함께 했다는 것이고 구지가에서 한국인의 신명 내지 신바람의 원형을 찾고자 하는 주장도 있다.

모티브

대표적인 모티프 : 난생모티프

난생신화는 특히 동남아시아지역에 많이 분포되어 있는데, 우리 나라 신화는 상당히 구체적인 편이다. 알은 '신이함'을 상징하며 원천을 하늘에 두고 잇다. 이때, 알의 탄생이 직접적으로 인간에 의한 것인가? 아니면 하늘로부터 스스로 내려온 것인가?에 따라 자연 천생란적 난생 모티프와 인위 인생란적 난생 모티프로 나뉜다.

자연 친생란적 난생 모티프
  • 예시 : <박혁거세 신화>, <김수로왕 신화>
  • 보통 아이가 아니고 천시의 아들이거나 태양의 아들임을 의미하기 때문에 처음부터 신성시됨.
인위 인생란적 난생 모티프
  • 예시: <동명왕신화>, <탈해왕신화>
  • 인간을 거쳐 알로 탄생되기 때문에 처음부터 신성시되기는 힘들고 오히려 지상에서 투쟁이나 고난을 극복하고 영웅적인 면모를 나타냄.

김수로왕과 석탈해의 대결

기록을 통해 가야와 석탈해의 접촉이 남아있다. 그런데 후술될 대결에 관해서는 정사에 해당하는 김부식의 <삼국사기>에는 없는 내용이다.단지 석탈해가 가야를 거쳐서 신라에 갔다는 내용만이 기술되어 있다. 이는 신화,전설,민담 등을 함께 엮은 일연의 <삼국유사>의 가락국편에만 남아있는 내용이다.

줄거리

" 탈해가 바다를 좇아서 가락국에 왔다. 키가 3척이요 머리 둘레가 1척이나 되었다. 그는 기꺼이 대궐로 나가서 왕에게 말하기를,"나는 왕의 자리를 빼앗으러 왔소."하니 왕이 대답했다. "하늘이 나를 명해서 왕위에 오르게 한 것은 장차 나라를 안정시키고 백성들을 편안케 하려 함이니, 감히 하늘의 명(命)을 어겨 왕위를 남에게 줄 수도 없고, 또 우리 국민을 너에게 맡길 수도 없다." 탈해가 말하기를 "그렇다면 술법(術法)으로 겨뤄 보려는가?" 하니 하니 왕이 좋다고 하였다. 잠깐 동안에 탈해가 변해서 가 되니 왕은 변해서 독수리가 되고, 또 탈해가 변해서 참새가 되니 왕은 새매로 화하는데 그 변하는 것이 조금도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탈해가 본 모양으로 돌아오자 왕도 역시 전 모양이 되었다. 이에 탈해가 엎드려 항복한다."내가 술법을 겨루는 마당에 있어서 매가 독수리에게, 참새가 새매에게 잡히기를 면한 것은 대개 성인(聖人)께서 죽이기를 미워하는 어진 마음을 가진 때문입니다. 내가 왕과 더불어 왕위를 다툼은 실로 어려울 것입니다." 탈해는 문득 왕께 하직하고 나가서 이웃 교외의 나루터에 이르러 중국에서 온 배가 대는 수로(水路)로 해서 갔다."

김수로왕 결혼 설화

줄거리(야유타국의 공주 허황옥과의 결혼)

"김수로가 강림하여 왕이 된 뒤로 배필이 없자 신하들이 대왕의 짝을 모색하고자 하였다. 그러자 김수로는 왕후를 삼는 것 또한 하늘의 명령이라며 이를 말린다. 왕이 드디어 왕비가 올 것을 알아보고 신하를 시켜 망산도에 가 기다리게 하자 정말로 붉은 돛은 단 배가 도착하여 16살의 아유타국의 공주와 갖은 패물이 함께 도착한다. 왕이 기뻐 직접 맞으러 가자 공주(허황옥)은 잘 모르는 사람을 어찌 따라갈 수 있냐고 하였다. 옳다 생각한 수로왕은 예를 갖추어 공주를 모시고 공주는 부황에 꿈에 신께서 결혼을 점지해 주어 오게 되었다 한다. 이에 궁궐로 돌어와 허황옥과 김수로는 혼인하였고 슬하에 10명 가량 되는 아들을 낳았다고 전해진다.영제 중평 6년 기사 3월 1일에 왕후가 죽으니 그 나이가 156세였으며 온 국민은 슬픔에 빠진다. 왕도 10년을 지난 헌제(獻帝) 입안(立安) 4년 기묘(己卯)3월 23일에 죽으니, 나이는 157세였다."

분석 및 의의

허황옥 이야기 또한 <삼국사기>에는 기록이 나오지 않으며 <삼국유사>가락구기편에만 등장한다.

김해 김씨와 김해 허씨의 선조로서의 의의

김수로왕은 그 자체로 김해 김씨의 시조일 뿐 아니라 허황후가 왕위를 잇는 아들 외에 2명의 아들에게 '김해 허씨'라는 성을 물려주어 선조가 된다. 이 설화를 토대로 실제 민속풍습 상 김해 김씨와 김해 허씨는 결혼을 꺼리는 관례가 있었다.

공주의 본국(아유타국)에 관한 의혹와 의의

아유타국의 존재와 이동 가능성

공주의 본국인 '아유타국'이 정말 그 시기에 있었던 인도의 왕국이 맞는 것인지, 또한 아유타국을 배로 이동해서 왔다고 되어있는데 과연 가능한 것인지는 의문이 많다. 그러나 이를 자세하게 설명하는 것은 본 페이지의 취지에 맞지 않으니 다음을 참고하자. 허황후

불교적 윤색을 위해 인도를 이용

허황후 본국을 '인도'로 설정하여 가야가 불교를 받아들일 당시 불교의 권위를 강조하기 위해 윤색했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실제 설화에서 허황후의 일곱 아들은 모두 승려가 되었고 허황후가 가져왔다는 피사석탑 또한 불교 문화재이다. 삼국이 불교를 받아들일 당시 인도는 불교의 모태이자 신비로운 나라라는 이미지가 강했기 때문에 윤색 과정에서 인도가 '채택'되었을 수도 있다는 학설이다.

허황옥이 정말 인도에서 왔을 가능성 (피사석탑)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삼국유사에 적혀있듯 허황옥은 한국으로 피사석탑을 가져온다. 이는 불교적 문화재이며 그녀의 부친이 배의 풍랑을 가라앉히기 위함이라고 챙겨준 것이기도 하다. 실제로 지금도 김해시의 수로왕비릉에 존재한다. 이 암석의 특징은 닭의 피를 바르면 흡수한다는 것인데, 실제로 한반도에서 나지 않는 엽락석 성분의 사암으로 중국,일본, 베트남 등에서 나는 재료이다.

허황옥 설화의 의의

일단, 정말 허황옥이 아유타국에서 왔다면 아마 그 지역은 인도의 아요디아일 것이라는 전제가 유지되고 있다.
이에,한국-인도 관계의 상징적 인물로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허황후 이야기를 기반으로 한 소설

비단왕후

출처:yes24
소설 《비단황후》는 소설가이며 현직 주한 인도대사인 N. 빠르따사라띠가 가야의 김수로왕의 부인인 허황옥의 밝혀지지 않은 부분을 소설가의 상상력을 동원해 복원한 역사소설이다.

김수로 일대기

김수로왕 신화의 발원지

참고문헌

[1]김수로왕 표준영정 전통문화포털
[2]허황후 표준영정 네이버 블로그 (표준영정이라 정부 이미지와 동일)
[3]김수로왕신화 네이버 지식백과
[4]책 비단왕후 yes 24
[5]방지영. "「김수로왕 신화」의 문화콘텐츠 스토리텔링 방안 연구." 국내석사학위논문 단국대학교 대학원, 2010. 경기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