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토르 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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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리몰리몰리예르 (토론 | 기여)님의 2022년 12월 10일 (토) 21:40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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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를 대표하는 최고의 작가 중 한 명이자, 서양 문학사의 가장 영향력있는 작가 중 한 명. 이 프로젝트 문서에 존재하는 ‘파리의 노트르담’ 과 ‘레 미제라블’ 을 저술했다.

생애

1802년 2월 25일 나폴레옹 휘하의 군인 아버지와 왕당파 집안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이는 레 미제라블의 마리우스 퐁메르시가 그의 자전적 캐릭터인 이유이기도 하다. 20살이 되던 해 아내 아델과 결혼 후 첫 시집을 발표한 것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문필 활동을 전개한다. 주로 왕당파적, 가톨릭적인 색채가 농후한 작품들이다. 위고가 낸 희곡 [크롬웰]은 고전주의 연극의 신조였던 삼일치의 법칙을 과감히 깨트리며 낭만주의 운동의 지도자로 급부상했다. 문필 활동의 중후반기에는 2월 혁명 당시 국회의원으로 당선된다. 정치적으로는 루이 나폴레옹을 지지했지만, 반동 정치가 시작되자 격렬하게 정부를 비판한다. 이후 반정부 인사로 낙인 찍힌 위고는 벨기에로 피신하고, 그곳에서 또 추방된다. 망명길에서 그는 《징벌(Les Châtiments, 1853)》, 《명상시집(Les Contemplations, 1856)》, 《세기의 전설(La Légende des siècles, 1859)》(제1집), 그리고 소설 《레 미제라블(Les Misérables, 1862)》 등의 대표작을 연이어 간행한다. 말년에 그는 폐렴으로 사망하고, 장례식은 국장으로 치러졌으며, 유해는 팡테옹에 안장되었다.

문학사적 의의

‘낭만주의 사조의 대표자’ 만으로는 수식이 어려운, 당대 최고의 작가로 평가받는다. 역작 ‘레 미제라블’ 을 통해 가난과 빈곤의 의미를 다시 정의하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리고 같은 맥락에서 정치적으로 매우 진보적이고 개방적인 인물이다. 레 미제라블에도 드러나 있듯이 하층민에 대한 관심, 가난한 자들에 대한 적극적 서술, 그리고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 대한 직접적인 저항 등이 그런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