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FRA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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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루리 (토론 | 기여)님의 2024년 12월 20일 (금) 23:57 판 (임진왜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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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문화유산 약탈


병인양요

일본은 조선초기부터 조선의 대장경을 부러워하였고 이러한 기술전수를 지속적으로 요청했다.

그 횟수가 무려 107회 다할 정도였으니 그들의 바램을 엿볼 수 있다.
실제로 일본은 조선과 사신을 주고받으며 문물교류 형식으로 고려대장경을 비롯한 불교문화재를 보급받았으며 이를 기반으로 일본의 불교문화를 발달시켜왔다.
그러나 1510년 삼포왜란 이후에는 조선과의 관계가 소원해지기 시작하며 조선의 문화를 수입하기 어려워졌다.

약탈을 위한 전쟁

이에 따라 일본은 임진왜란, 정유재란을 통해 '약탈을 위한 전쟁'의 사전계획을 세웠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왜란 당시 장수들에게 도서, 공예, 포로, 금속, 보물, 축부 6개의 특수부대를 조직하였고 조선의 보물들을 약탈했다.
이러한 문화재 약탈 계획에서는 특히 출판 문화유산과 불교 관련 유물에 중점을 두었다.
그 만큼 일본에서는 서적이 귀했으며 조선의 불교 및 서적 양식을 가치 있게 평가한 것이다.

실제로 귀한 서적류 약탈을 위해 일본의 승려들을 동원했으며 주요 장수 옆에 위치하여 수 천권의 서적들을 약탈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전투가 끝난 이후 이러한 약탈 서적들을 몰수하였고 본인이 직접 보관할 만큼 중요하게 다루었다.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많은 서적 문화유산을 바탕으로 정치철학과 정책을 만들었고 265년 간 안정적인 통치를 하였다.
새로운 집권체제를 유지할 수 있었던 배경은 조선의 성리학을 수용하여 막부와 각 번의 기초사상을 이루었고 중앙집권체제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이다.


일제강점기

일제강점기 전반에 거쳐 일제는 수많은 조선의 문화유산을 일본으로 반출하였다.

문화유산 반출에는 통감부나 조선총독부의 공권력이 행해졌을 뿐만아니라 일본인 개인의 도굴이나 밀거래 등에 의해서도 이루어졌다.
이들은 당시 문화재의 이동이 불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몰래 반출해갔다.
일본인들이 반출해간 문화유산에는 고적조사 중 발견된 유물, 석조유물, 건조물, 도자기, 서적 등 그 종류가 매우 다양하며 현재까지 파악된 반출 수량은 약 7만 여점에 이른다.

초대 조선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

이토 히로부미 다음으로 부임한 조선통감과 초대 총독을 지낸 데라우치 마사타케는 통감과 총독의 지위를 이용해 문화재를 열심히 수집하고 반출하였다

그가 가져간 문화유산은 가야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만들어진 소중한 공예품을 비롯해 그림, 글씨, 서적 등 1,500여 점에 달한다.

이렇게 반출된 문화유산은 데라우치의 고향인 야마구치에 세운 도서관에 '오호 데라우치 문고'에 소장돼 있었다.
이 도서관은 데라우치 가문에서 운영해다가 데라우치가 죽자 인근에 세워진 아마구치 대학에 기증되었다.
이 가운데 그나마 135점의 문화유산만이 1996년 데라우치 문고에서 경남대학교로 기증되었다.

야마나카상회

야마나카상회는 일제강점기 고미술 무역상이다.

오사카의 고미술상인 야마나카 데이지로가 1894년 미국, 영국, 프랑스, 중국 등에 점포를 차려 수집가들에게 팔았다.
특히 1923~36년 일본을 중심으로 수십 차례의 대전람회를 개최하여 수많은 우리의 문화유산을 서구와 일본에 반출하였다.

당시 많은 문화유산들이 일본인 또는 도굴꾼 등에 의해 뜯겨지고 빼돌려져 일본으로 반출되었는데
이들 문화재 중 상당수가 일본의 미술품상 야마나카상회에 넘겨졌고 야마니카 상회는 약탈 문화재를 수리하거나 보정한 뒤 일본인에게 되팔거나 미국 경매시장에 넘겼다.

전세계로 유출된 문화유산

그러던 중 1941년 일본의 진주만 공습 이후, 미국 정부는 야마나카상회가 미국내에 보관하던 모든 문화재를 몰수하였고 패전국인 일본의 재산으로 전락하였다.
패전국의 자산으로 인식된 이 문화유산들은 결국, 모두 뉴욕 경매시장에서 처분됐다. 이때 약탈된 문화재 상당수가 일본, 미국은 물론 세계 곳곳을 유랑하고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오구라 다케노스케

오구라 다케노스케는 일제강점기 조선에서 활동한 사업가이자 미술품 수집가이다.

그는 대구에서 대흥전기, 남선합동전기라는 조선 최대의 전기회사를 설립한 후 엄청난 부를 축적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1921년 무렵부터 본격적으로 유물을 수집하여 일본과 대구의 자신의 집에 보관하고 있다가 광복을 맞이하자 일본으로 돌아가 '오구라 컬렉션 보존회'라는 재단을 설립하였다.
그가 죽고 재단은 아들에 의해 운영되어 오다가 1982년에 도쿄국립박물관에 기증되어 현재 3층 동양관에 전시되어 있다.

그가 수집한 유물들은 대부분 정당한 매입을 통해 얻은 것이 아니라 도굴에 의한 것이다.
실제로 그가 거주했던 대구와 서울의 집앞에는 골동상인과 도굴꾼들이 문전성시를 이루었다고 하고
조선인 도굴꾼들도 고용하여 고분의 유물들을 쓸어갔다고 한다.

그가 수탈해간 유물의 공식적인 숫자는 광복 후 가져가지 못한 것, 대구의 자택에서 발견된 것, 도쿄국립박물관에 기증한 것을 포함하면
2천 2백여 점으로 파악하지만 숨기고 있는 유물까지 포함한다면 4천 여점에 이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1]

1965년 한일 문화재협정 시 한국 측에서 불법 유출된 문화재로서 반환을 요구했으나 사유 문화재라는 이유로 반환되지 못했다.
도쿄국립박물관에 기증되어 국유재산이 된 후 우리나라에서 반환을 요청했으나 아직까지 반환되지 않고 있다[2]


참고문헌

김정숙. 2018. 「임진․정유재란기 약탈된 출판문화재에 관한 연구」. 한국출판학연구, 44(5). 5-27.
박진이. 2016. 「일제강점기 문화재 반출과 조선인의 대응」. 국내석사학위논문 강원대학교, 강원특별자치도.

이은화. 2019. 「한국문화재의 일본 반출과 환수에 관한 연구」. 국내석사학위논문 전남대학교, 광주.

  1. 대구의 자택에서 발견된 것도 수도 공사를 하다가 매장해놓은 유물들을 발견한 것이기 때문에 숨겨놓은 유물들이 많은 것으로 추정된다.
  2. 사유재산이라는 명목으로 반환을 거부했지만 국유재산이 된 이후에도 반환을 거부하고 있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