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독립운동 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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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토마토 (토론 | 기여)님의 2024년 6월 22일 (토) 17:09 판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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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광복군
상하이에서 활영한 한국광복군 대원들의 모습이다.

개요

일제 강점기 시기 중국은 한국의 항일독립운동을 다양하게 지원하였다. 한국과 중국은 모두 반일 감정을 토대로 일제에 반격하기 위해 서로가 서로에게 도움을 주는 관계를 유지하였다.

한국의 독립운동 단체를 중심으로 하여 중국이 지원을 준 사례로는 대표적으로 우익 진영인 중화민국, 국민당 측이 한국광복군을 크게 지원하였다는 점이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외에도 잘 알려지지는 않았으나 좌익 진영인 중국 공산당 측 역시 좌익 성향 독립 단체들을 지원한 바 있다.

중국의 독립운동 지원 배경

일제라는 공동의 적

조선이 일본 제국주의에게 국권을 빼앗길 경술국치 무렵, 중국 역시 일본의 침략 야욕을 받아내고 있었다. 일제라는 공동의 적을 두고 중국과 조선의 양 국민이 힘을 합쳐야지 일제 타도 및 해방을 이룰 수 있음을 인식한 이후 두 나라 간 밀접한 관계가 형성되었다. 한국의 여러 독립단체, 독립투사 및 운동가들은 만주를 비롯한 중국 대륙으로 넘어가 활동을 시작하자 중국은 이를 도왔으며, 특히 중국 공산당, 중국 국민당 등 중국의 각 정치세력들은 각자의 이념 및 정책방향에 맞추어 한국독립운동을 지지, 각자의 방식으로 한국의 항일투쟁에 참여하였다.

중국의 이해관계

물론 순수하게 일제를 몰아내어 함께 독립하자는 의도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한민족을 중화민족 및 중화문화 체계의 일원으로 포괄하여 파악하는 특유의 중화의식이 자리잡고 있었음은 부인할 수 없는 부분이다. 또한 한국의 독립운동 진영을 중국항일전쟁의 동반자로 설정한 후 임정을 한국 독립운동의 최고 지휘사령관으로 올리려 하였는데, 이러한 임정 중심의 한국 독립운동 세력 단결 시도는 종전 후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 확보를 위한 구상과도 연관이 있었다.

지원 양상

중화민국

임정에 대해서는 중국의 국공양당이 모두 지원하였다고 말하는 것이 사실이나 한국에서는 대체로 국민당이 중심이 되어 임정을 지원하였다고 알려져 있는데, 이는 이념적으로 임정과 국민당이 같은 계열에 속해 있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공산당이 중화인민공화국을 세우기 전, 중화민국 시절 집권당이었던 국민당의 주요한 지원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방면에서 이루어졌다. 첫째, 임시정부가 안전하게 전이할 수 있도록 도움으로써 정무의 정상적인 진행을 보장하였다. 훙커우 사건 이후 중국은 임정이 상해로부터 남경으로 이전할 수 있도록 도왔으며, 1937년 중일전쟁의 여파가 남경에까지 미치자 국민정부기관이 중경으로 이동함과 동시에 임정 역시 장사로 이동할 수 있게 했고, 이후 일본군이 대아만에 상륙하자 중경정부는 임정의 중경으로의 전이를 허가, 대량의 준비 작업을 도왔다. 둘째, 한인 내부 각 당파 사이의 연합을 촉진시킴으로써 독립운동의 전개에 이롭게 하였다. 당시 여러 가지 원인으로 임정은 내외부적으로 상당한 파벌싸움과 모순에 휘말려 있었는데, 이는 한국의 독립운동에 불리할 뿐만 아니라 국제사회의 승인을 얻는 데에도 제약이 생길 수 있는 요인이었다. 이에 따라 국민당은 그들이 통일 된 당을 조직할 수 있도록 지지하였으며, 해당 시도가 실패로 돌아가자 차선책으로 각 당으로 하여금 마음을 합쳐 임정 중심으로 단결하도록 하였다. 임정에 참여하지 않으면 중국 측의 경제적 지원을 받지 못하게 하는 등의 강경한 수단 또한 동원하였다. 셋째, 한인 무장역량의 구성을 도와주었다. 7.7사변 이후 중국 정부는 재중 한인항일지사들의 훈련을 도와 하나의 군대를 구성할 수 있도록 했다. 중국 관내에서 먼저 건립된 좌익 진영의 조선의용대 이후 국민당 역시 한국광복군이라는 한인무장대오의 건립을 허가 및 지지하였으며 중국 경내에서의 활동을 합법화하고, 대량의 경비를 수요로 하는 문제 등의 근본적인 해결을 도왔다. 넷째, 재정적으로 임정을 지원해줌으로써 정무와 군사 활동의 전개를 보장해 주었다. 여기에는 임시정부 의정원의 일상사무 비용 및 성원들의 생활보조금이 포함된 정무비, 한인 각 당파에 대한 보조금이 포함된 당무비, 한국광복군의 장비, 급양 및 정공, 훈련 등 비용이 포함된 군사비, 일할 수 없는 한인 노인, 아이, 부녀, 환자 등에 대한 생활구제 비용인 교민생활비 등의 항목이 포함되었다.

당시 한국 정치에 미친 영향

베트남 전쟁 파병으로 인해 베트남 특수가 왔고 신흥 대기업이 성장하는 등 한국의 경제 성장은 가속화되었으나, 그 과정에서 군인이나 노동자에 대한 보상이 불충분한 문제가 발생하였다. 따라서, 박정희 정부에 대한 불만이 고조되거나, 노동자들이 빌딩에 불을 지르는 등의 혼란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또한, 박정희 정부는 전투 파병 인원과 그로 인한 공백을 메울 인원을 모집하기 위해 21~30살의 청년들을 징병했다. 이 과정에서 징병 기피자들, 24살 이상 대학생들, 장기 휴학생들을 대상으로도 집요하게 징병하였고 예비역을 재입대 시키기도 했다. 이를 통해 박정희 정권에 불만을 품고 저항할 가능성이 가장 높은 세대 중 하나인 20대 남성 청년 세대에 대한 통제 시스템을 강화할 수 있었다. 또한, 원활한 징병 등 여러 이유를 근거로 주민등록법을 시행하여, 전 세대를 대상으로 통제를 강화했다. 이러한 통제 시스템은 차후 박정희 정권의 유신 개헌에 대한 반대를 용이하게 통제하도록 했고 독재 체제 강화 및 유지의 밑거름이 되었다.

관련 영상

참고문헌

<<베트남전의 영향 및 배경과 관련하여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베트남전쟁 파병" 참조>> <<중국의 구체적 지원 양상에 대해서는 강수옥.(2019).항일전쟁시기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대한 중국의 지원.한국학논집,77(),61-97. 참고 및 참조.>> <<사진 자료는 임시정부 주석 김구의 '한국광복군 공개 사열'희귀 사진 발견, 김빛이나, 천지일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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