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열(민주화항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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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yungoesto (토론 | 기여)님의 2024년 6월 9일 (일) 23:00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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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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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열 (1966.~1987.)

학생운동가로, 1987년 6월 9일 전두환 정권의 독재 타도와 5.18 진상 규명 등을 외치는 시위에 참여했다가 전경이 쏜 최루탄을 맞아 사경을 헤매다가 세상을 떴다. 당시 이한열 열사가 최루타을 맞았다는 소식은 전 국민의 분노를 일으키면서 6월 항쟁과 민주화 선언의 도화선이 되었다.

정보

학생운동

1966년 8월 29일 전남 화순에서 태어난 이한열 열사는 연세대학교 경영학과 입학 후 본격적으로 학생운동가의 길에 들어섰다. 1987년 6월 9일 '6·10대회 출정을 위한 연세인 결의대회'에 참석했던 이 열사는 결의대회를 마친 뒤 1000여 명의 학생들과 함께 연세대학교 정문 앞에서 시위를 벌였다. 그러나 경찰은 시위 진압을 위해 학생들에게 최루탄을 쐈고, 이 과정에서 이 열사는 최루탄을 맞고 쓰러졌다. 고인은 함께 시위에 참여했던 학우의 부축을 받아 시위 현장을 빠져 나왔는데, 이 장면을 로이터 통신 기자가 촬영해 보도하면서 해당 사건은 전국적으로 알려지게 됐다.

전국적 시위로의 확장

이후 이 열사가 최루탄을 맞았다는 소식에 시민들의 분노는 커졌고, 이는 6월 10일부터 29일까지 약 20일 동안 학생과 시민 등 1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민주화를 외치며 거리로 몰려나오는 계기가 됐다. 이 시위가 지속적으로 이어지자 결국 전두환 군사정권은 6·29 선언을 통해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수용했다.

영원히 잊지 않을 죽음

한편, 경찰이 쏜 최루탄에 머리를 맞아 의식을 잃은 이 열사는 27일간 의식을 차리지 못했고 결국 1987년 7월 5일 세상을 떠났다. 이한열의 장례식은 1987년 7월 9일 ‘민주국민장’으로 치러졌다. 운구 행렬은 연세대학교 본관과 신촌 로터리를 거쳐 서울시청과 광화문을 지나 광주로 이동하였으며, 국립5 · 18민주묘지에 안장되었다. 운구 행렬이 지나는 동안 서울 100만 명, 광주 50만 명 등 전국적으로 총 160만 명의 추모 인파가 운집하였다.

이후 고인은 망월동 5·18 묘지에 안치됐으며, 사망 14년이 지난 2001년이 되어서야 권위주의 정권에 항거하다 숨진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결정돼 정부에 의해 공식적으로 명예를 회복했다.

참고문헌

[네이버 지식백과] 이한열 (시사상식사전, pmg 지식엔진연구소), 2024년 6월 9일 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