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언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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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방언
제주어
일제강점기의 제주어
일제강점기 이후부터 현대까지의 제주어
제주어 음운론
제주 방언은 다른 지역 방언과 달리 많은 특수성을 지니고 있다. 지리적 조건과 역사적 배경이 독자적 특성을 유지하게 했다. 제주 방언의 특징 중에서도 특히 음운적 특징이 두드러진다.
제주어 통사론
육진 방언
표준어
표준어 제정
한국어의 표준 규정은 크게 한국의 표준어와 북한의 문화어가 있다. 한국의 표준어와 북한의 문화어는 규범에서 다소 차이가 있으나, 모두 1933년 한글 맞춤법 통일안 제정 당시의 서울 방언을 기반으로 만들어졌다.
조선 건국 이래로 서울이 정치적, 문화적 중심지 역할을 하였기 때문에 서울 지역의 언어가 공통어의 역할을 했고, 이것이 표준어로 규범화된 것은 일제강점기이다. 한국어의 공적 표준에 대한 최초의 명문화된 규정은 일제강점기인 1912년 4월에 공포한 '보통학교용 언문철자법'에 "경성어를 표준으로 함"이라고 한 규정이다. 그러나 이것은 맞춤법에 대한 규정이지 어떤 어휘나 문법을 표준으로 규정하는 것은 아니었다. . 1930년대에 조선어학회는 조선어(한국어) 보급을 위해서는 표준을 확립할 필요가 있다고 느껴 1933년에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제시하였는데, 이때의 표준어 규정의 대원칙은 "표준말은 대체로 현재 중류 사회에서 쓰는 서울말로 한다."였다. 그리고 1935년부터 표준어 어휘 사정 관련 작업에 착수했는데 그 결과물은 1936년에 '사정한 조선어 표준말 모음'으로 결실을 맺었으며, 9457개 단어에 대해 표준어, 준말, 비표준어, 한자어 등으로 분류하였다.
사정 위원회의 위원은 모두 73명이었는데, 서울 출신 26명과 경기 출신 11명 및 기타 도별 인구수 비례에 따라 배정한 36명으로, 서울·경기 출신 위원을 반수 이상으로 선출한 것은 “표준말은 대체로 현재 중류 사회에서 쓰는 서울말로 한다.”는 「한글 맞춤법 통일안」의 규정을 고려한 것이었다.
사정 원칙에 있어서도 “서울말로써 으뜸을 삼되, 가장 널리 쓰이고 어법에 맞는 시골말도 적당히 참작하여 취하였다.”고 하였다. 조선어학회는 여기서 더 나아가 제대로 된 국어사전을 편찬해 어휘의 완전한 규범화를 꾀했으나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관련자가 전부 일제 경찰에 잡혀가 무산되었다.
해방 이후로는 남북에 별도의 정부가 수립되면서 표준어 규범에도 차이가 생겼다. 한국에서는 1948년 이후 한글 맞춤법 통일안에 기반한 맞춤법 규정과 조선어학회의 조선어 표준말 모음을 그대로 표준어 규정으로서 사용해 왔지만, 시대가 흐름에 따라 조선어 표준말 모음의 표준어 규정에 내재한 미비점, 시대에 따른 어휘 변화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는 점, 표준 발음법 미비 등의 문제점이 제기되었다. 그리하여 1970년대부터 한국어의 표준어 및 맞춤법 규범을 재확립하기 위한 연구에 들어갔고, 이는 1988년에 표준어 규정과 한글 맞춤법으로 결실을 맺었다.현재 한국 표준어의 규정은 이 표준어 규정과 한글 맞춤법에 근거한다.
한편 북한에서는 1948년에 김두봉이 조선어 신철자법을 제정하여 맞춤법을 대폭 개정했다. 그러나 김일성에 의해 김두봉이 숙청된 후 1954년에 다시 맞춤법을 제정하면서 한글 맞춤법 통일안에 기준한 표기로 되돌아갔다. 어휘는 조선어학회에서 정한 '사정한 조선어 표준말 모음'에 기반했다. 북한은 대한민국에 비해 조선어 사전 편찬이 상당히 늦었는데, 사전 편찬 작업이 6.25 전쟁으로 전면 중단되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1956년에 조선어 소사전을 펴낸 것이 최초였다. 1960년에는 북한 최초의 공식 조선어 사전이 발간되었고, 1966년에 조선말 규범집을 출간해 독자적인 표준어 규정을 확립했다. 그리고 김일성의 교시에 따라 이렇게 정립된 북한의 조선어 규범에 문화어라는 이름을 붙였다.
변천과정
방언 교육 및 보존 방안
2005년 1월 27일 제정된 국어기본법 제4조 국가와 지방자치단체의 책무 제1항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기술되어 있다. 국가와 지방자치단체는 변화하는 언어 사용 환경에 능동적으로 대응하고, 국민의 국어능력의 향상과 지역어의 보전 등 국어의 발전과 보전을 위하여 노력하여야 한다. 이렇게 법 조항까지 있는 것으로 보아 국가도 방언 보존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방언이 처음에는 국어정책의 관심 대상이 아니었다. 방언은 학문적 관심의 대상일 뿐 정책적인 접근은 거의 이루어 지지 않았다. 이런 방언이 관심 받게 된 것은 2000년대 이후 였다. 영화, 드라마와 같은 대중매체에서 나오는 방언의 비중이 증가하게 되고 그 무렵 사회 분위기는 방언을 긍정적으로 보는 추세 였다.
해외 방언
고려말
러시아와 중앙아시아의 여러 나라에 살고 있는 한인들은 자신들의 모국어를 고려말이라고 부른다.러시아 혁명 전 연해주의 한인 신문,잡지,교과서는 '대한국'또는 '한국','한인'이라는 말을 썼지만 러시아 혁명 후가되는 1920년대부터는 '고려','고려인','고려말'이라는 말을 쓰기 시작하였다.민족주의에 바탕을 둔 애국계몽운동시기가 끝나고 소비에트 사회주의 혁명이 전개되면서 '고려'라는 말이 등장한 것이다.이주 후에는 조선,고려라는 말을 함께 썼으나 구소련의 해체 이후 공식적으로 고려,고려인이라는 말을 쓰기 시작하였다.고려말,고려음식.고렷법(한민족의 전통 예법이나 관습),고렷글(한국어로 쓰인 글),고렷사람/고렷사름(러시아와 중앙아시아에 사는 한인),고려촌(한인들이 모여 사는 마을)등은 한인들이 일상적으로 쓰는 말이다
(1)고려말의 음성 특징
러시아어의 간섭으로 'ㄹㄹ'을 러시아어 유음 'Л[l]로, 'ㄹ'을 'Р[r]'로 조음하는 경향이 있다.또 어두 'ㅅ'를 [z]나 [c=ts]로 발음하기도 한다.[w]를 [v]로 조음하는 것도 러시아어의 영향이다.그리고 '지'를 '즈'와 '주'의 중간음 정도로 발음하기도 한다.예를 들어서 나주다(나지다,없던 것이 새로 나타나다),가주다(가지다),-주(-지,부정어미) 등.
(2)고려말의 음운 체계
'죄'는 자음 뒤에서는 원순성이 약화되어 있다.예를 들어서 쇠고기를 쇠고기와 세고기 사이로 발음하는 것이다.그러다 어두 위치에서는 이중모음 [we]로 나타난다.예를 들어서 외국을 웨국으로,왼쪽을 웬짝이라고 발음하는 것이다.또 '쇠'를 '쇄'로 발음하기도 하는데 이는 육진방언의 영향이다.육진방언에서는 대체로 'ㅚ'가 'ㅙ'로 변화하였다.
(3)고려말의 음운 현상
1.구개음화 형태소 내부의 ㄷ(ㅌ) 구개음화는 완료되었다.그러나 아래 예처럼 특이하게도 비구개음화형을 쓰기도 하는데 이는 육진방언의 영향이다. 예:피 한고티두(피 한 방울도),빗고티(빗방울),물고치(물방울),오좀고치(오줌방울),다티다(다치다) 한편,형태소 경계(굴절)에서의 ㄷ구개음화는 원칙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으나 몇 예가 보인다.'빋','곧',젙'은 그 주격형(또는 서술격 조사 '-이-' 결합형)이 언제나 [비디],[고디],[저티]로 실현된다.그러나 특이하게도 '낟'은 모음으로 시작하는 조사 앞에서 /낮/으로 교체된다.즉,부사격 조사 '-으르' 앞에서도 /낮/으로 교체되어 교체 범위가 확대된 것이다. 예:낮으로 빼엡더마.그전에 싹 낮으로 베에.낮을르 빼서 싹 묶어서 이래 조배기로 햇놧스 음.그 담에 그담에는 마술게다두 실어딜이그.뱃단으 싹 낮을르 삐문,다른 걸르 무스거 빼에.그전이 직금 와서 깜빠이나 잇는두.(뜻:낫으로 베더군요.그전에 싹 낫으로 베어.낫으로 베어서 싹 묶어서 이렇게 15단씩 무지를 지어 놓았지.그 다음에 그 다음에는 말 수레 따위로 실어들이고 볏단을.싹 낫으로 베면,다른 걸로 뭘 베어(=낫 외에는 벼를 벨 것이 없었다는 말).그전이,지금 와서 콤바인이나 있는지.)
조선어
일제강점기의 중국 조선어
<중국에서의 조선어 방언분포 과정 및 양상 고찰>(김광수, 김홍매, 2022)에서는 '조선어'를 연변 조선족 자치주를 비롯한 요녕성 일대, 중국 전지역에 분포한 모든 한국어 방언을 총칭하는 술어라 하였는데, 필자는 이에 동의하여 여기에서도 그렇게 정의하도록 하겠다.
조선어 방언분포는 조선인들의 중국 동북으로의 이주역사와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에 조선인들의 이주역사에 대한 탐구가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1. 이주 초기(연도 제시하기)
이주 초기 조선인들의 이주 노선은 다음과 같이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표 넣기)
또한 이주 초기 연도별 재만 조선의 출신은 다음과 같았다.
(표 넣기)
1910년 이전에 압록강과 두만강 이북의 지역들에 이주한 조선인은 대부분 함경도와 평안도 출신이었다. 그중에서도 함경북도와 평안북도의 이주민이 제일 많았다. 조선인들 중에는 제주도 출신도 있었기 때문에 한반도의 주요 방언들이 모두 중국으로 유입되었다고 볼 수는 있으나, 실제로는 동북 방언(정평 이북의 함경도 방언), 동남 방언(주로 경상도에서 쓰이는 방언), 서북 방언(주로 평안도와 자강도에서 쓰이는 방언. 황해도의 멸악산맥 이북 지역과 안악, 은율, 송화, 신천 등 서북 해안 지역의 방언도 서북 방언에 속할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중부 방언(경기 방언, 충청도 방언, 황해도 남부의 방언, 강원도 방언의 총칭), 서남방언(전북의 대부분, 전남의 동부인 구례와 광양 일대, 그리고 전남 서부의 대부분 지역과 전북의 고창 등에서 쓰이는 방언)이 주로 쓰였고, 제주도 방언은 그만큼 쓰이지 않았다.
2. 한일합병 이후
1910년 8월, 일본은 '한일합병조약'을 체결하였다. 이때부터 많은 조선인들이 중국 동북 지역으로 이주하기 시작하였다. 1931년에는 동북의 조선인 인구가 63만 900여 명이었는데 연변지역 4개 현에 40만 9400여 명, 길림, 장춘 지역에 2만 4100여 명, 안동, 통화 지역에 5만 500여 명, 심양, 철령 지역에 9만 7100여 명, 여순-대련 지역에 1700여 명, 북만주에 4만 4400여 명, 기타 지방에 1000여 명이 분포하게 되었다.
이주 조선인의 출신 지역은 함경도, 평안도, 경상도 순서대로 높은 비율을 차지하였다. 함경도 출신 이주민은 주로 북간도에, 평안도와 경상도 출신 이주민은 주로 서간도에 자리를 잡았다.
이 시기 조선어 방언 분포 지역은 다음과 같이 크게 세 지역으로 구분할 수 있다.
함경도 방언 지역: 연변 지구, 목단강 지구, 합강지구의 일부 지방(목단강 지구와 인접하여 있는 일부 지방), 통화 지구의 장백 지방
평안도 방언 지역: 단동 지구, 무순 지구, 심양 지구, 영구 지구, 철령 지구, 통화 지구(장백 지방 제외)
경상도 방언 지역: 장춘 지구, 길림 지구, 사평 지구, 송화강 지구(하얼빈 시 포함), 수회 지구, 합강 지구(목단강 지구와 인접하여 있는 일부 지방 제외) (출처: 북경대학 조선문화연구소, <<언어사>>, 민족출판사, 1995, 678쪽.)
현대 조선어 음운론
중국 조선어 음운론 연구가 미비한 관계로 요녕성의 조선어에 대한 내용만 실었음을 밝힌다.
중국 요녕성은 중국 조선족이 거주하는 산재 지구로써 평안도 방언과 경상도 방언이 주로 사용되며 방언섬들도 존재한다.
요녕성의 심양시, 무순시, 본계시, 단동시, 반금시, 영구시는 주로 평안도 방언이 사용되며, 철령시, 안산시는 주로 경상도 방언이 사용된다.
1. 모음의 변화
(1) 모음 'ㅏ', 'ㅓ'의 앞모음화: 모음 'ㅣ' 역행 동화
요녕의 모든 지역에서 나타남.
가마 > 가매 처녀 > 체네 부스럼 > 부스레미 두드러기 > 두드레기 할머니 > 할매 할아버지 > 할배 엄마 > 엄매
(2) 모음 'ㅣ'가 'ㅟ'로, 'ㅟ'가 'ㅜ'로 바뀌는 현상
평안도에서 대표적으로 나타남. 즉, 심양시와 무순시 등 평안도 방언이 사용되는 지역에서 들을 수 있음.
사마괴 > 사마귀 > 사마구
'사마괴'는 '사마귀'의 변화를 거치는데, 중세의 'ㅟ'는 이중모음으로써 'ㅜㅣ'로 발음되었다. 평안도에서 앞의 'ㅜ'만 발음되었고, 그것이 현대 방언에 남아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 외에도 '방긔'가 '방구'로, '글픠'가 '글푸'로 발음되는 것을 예시로 들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