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철
목차
인적사항
이름
박종철(朴鍾哲)[1]
출생 및 사망
- 출생 : 1965년 4월 1일 부산
- 사망 : 1987년 1월 14일
가족 관계
- 부 : 박정기
- 모 : 정차순
- 형 : 박종부
- 누나 : 박은숙
2남 1녀 중 막내
학력
중학교 | 부산 영남제일중학교 |
고등학교 | 부산 혜광고등학교 |
대학교 | 서울대학교(언어학과) |
생애
대학 생활과 학생 운동
1학년
- 친구의 권유로 비공개 운동 조직에 가담해 학생운동을 시작하였다.
- 학생운동은 두 영역으로 구분되어 진행되었다.
- 하나는 비공개 운동 조직, 다른 하나는 과 학생회
- 비공개 운동 조직의 주요한 활동 : 선배 지도하의 독서토론(일명 세미나), 합숙 MT, 유인물 살포, 가두시위, 공활로 불렸던 공장 취업 활동 등
- 과 학생회 활동 : 농촌 봉사 활동, 학회 활동 등
- 하나는 비공개 운동 조직, 다른 하나는 과 학생회
- 1984년 1학년 시기에는 주로 학습 활동에 참여하였으며, 세미나 외에 합숙 등의 형태로 진행되었다.
- 학습은 한국 근현대사와 함께 경제학 등에 집중되었다.
- 학습은 한국 근현대사와 함께 경제학 등에 집중되었다.
- 4.19혁명 기념식 시위에 참가하고 유인물 살포, 가두시위 등도 수행하였다.
- 여름방학 기간 : 충청북도 영동군에서 진행된 농촌 봉사 활동에 참여하였다.
- 2학기 : 이른바 ‘서울대 프락치 사건’ 등으로 정권의 탄압이 강화되자 시험 거부 투쟁이 전개되었는데, 과 대표로서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2학년
- 2학년이었던 1985년에는 서울미문화원점거사건이 발생하였고, 이를 지지하기 위한 가두 투쟁에 참여하였다가 검거되어 5일간 구류 처분을 받았다.
- 여름방학 : 전라북도 익산군에서 진행된 농촌 봉사 활동에 참여하고, 이어 대림동 세왕전기 공장에 취업해 활동하는 공장 취업 활동도 수행하였다.
- 2학년 말에는 비공개 운동 조직이 해체되고 새롭게 개편된 ‘서울대 반제반군부파쇼 민족민주학생투쟁위원회’에 참여해 활동하였다.
3학년
- 과 학생회장에 출마해 당선되었으며, 학생회장으로서 신입생 환영회, 교련 반대 투쟁 등을 진행하였다.
- 1986년 4월 11일 청계피복노동조합 합법성 쟁취대회 가두시위에 참석하였다.
- 이때 체포되어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으로 징역 10월에 집행유예 2년 형을 선고받고 7월 15일 석방되었다.
- 이로 인해 유기정학을 받아 학교생활이 곤란해졌고 향후 투쟁을 위한 준비에 집중하였는데, 이 와중에 팀 선배로 수배 생활을 하던 박종운을 만나게 되었다.
- 이때 체포되어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으로 징역 10월에 집행유예 2년 형을 선고받고 7월 15일 석방되었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경찰은 '민주화추진위원회사건' 관련 수배자 박종운의 소재 파악을 위해 그 후배인 박종철을 불법으로 체포했다.
경찰은 박종철에게 폭행과 전기고문, 물고문 등을 가했고, 결국 박종철은 1987년 1월 14일 치안본부 대공수사단 남영동 분실 509호 조사실에서 사망하고 말았다.
박종철의 사망해 대하여 강민창 치안본부장은 "냉수를 몇 컵 마신 후 심문을 시작, 박종철군의 친구의 소재를 묻던 중 갑자기 책상을 탁 치자 ‘억’ 소리를 지르면서 쓰러져, 중앙대 부속 병원으로 옮겼으나, 12시경 사망하였다"고 공식 발표했다.
그러나 부검의(剖檢醫)의 증언과 언론 보도 등으로 의혹이 제기되자 사건발생 5일 만인 19일에 물고문 사실을 공식 시인했다. 그리고 수사경관 조한경과 강진규 등 2명을 구속했다.
정부는 내무부장관 김종호와 치안본부장 강민창의 전격 해임과 고문근절 대책 수립 등으로 사태를 수습하려 했다.
1987년 5월 18일 광주민주화운동 7주기 추모미사에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김승훈 신부는 박종철 고문치사와 관련된 경찰의 은폐 조작을 폭로했다.
치안본부 5차장 박처원 등 대공간부 3명이 이 사건을 축소 조작하였고, 고문가담 경관이 2명이 아니라 5명이었다는 사실이 폭로되었다.
안기부, 법무부, 내무부, 검찰, 청와대 비서실 및 이들 기관의 기관장이 참여하는 관계기관대책회의가 은폐 조작에 조직적으로 관여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박종철 고문치사와 은폐 조작사건은 전두환정권의 정당성에 큰 타격을 주었고 정권 규탄 시위를 촉발했다.
이 사건은 1987년 6월항쟁의 중요한 계기로 작용하여 민주화운동의 촉매제 역할을 했다.
참고문헌
- 「박종철(朴鍾哲)」(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朴鍾哲 拷問致死 事件)」(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영상한국사 I 104 경찰의 박종철 고문치사 은폐 시도와 언론의 취재」(KBS 역사저널 그날)